『이주하는 인류』 샘 밀러 “우리 모두는 이주민이자 그들의 후예들, 이동과 이주는 피할 수 없다” [김용출의 한권의책]

김용출 2023. 8. 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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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가 흩날리던 2011년 5월, 아일랜드 오팔리주 머니갤이라는 작은 마을에 VIP를 실은 헬리곱터가 나타났다. 곧이어 수많은 자동차들이 몰려들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부부가 외가 조상의 옛집을 방문한 것이다. 자신이 아일랜드에서 이주해온 후손임을 확인한 오바마 부부는, 이어서 근처 펍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오바마가 재선을 겨냥하고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강화하기 위한 캠페인이었다.

오바마는 흑인이고 이주민 출신이라는 자신의 유산에 대해서 종합적이고 설득력 있는 견해를 가진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자신을 흑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혼혈 유산 역시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는 첫 번째 대선 유세 중 했던 다음의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하와이 한국인 이민자와 그의 자손
“나는 케냐에서 온 흑인 남성, 그리고 캔자스에서 온 백인 여성의 아들입니다. 나는 노예, 또 노예 소유자의 피를 이은 미국 흑인과 결혼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소중한 두 딸에게 물려줄 유산입니다. 내게는 세 대륙에 걸쳐 흩어져 있는 온갖 피부색을 가진 온갖 인종의 형제, 자매, 조카, 삼촌, 사촌들이 있습니다.”(234쪽)

이미 자신들의 터전에 잘 정착해 있는 사람들은 이주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걱정한다. 이주민 문제는 때론 사람들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일부 정당은 정치노선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일부 정치가는 자신의 득실에 따라서 이민을 반대하거나 찬성하면서 혐오나 국민감정에 불을 붙이기도 한다.

이민과 이민자들에 대한 태도는 경제 주기에 따라서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성장기에는 더 많은 노동력이 경쟁력이니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이민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하지만 경제 침체가 되면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이민자들이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거나 혐오한다.

“우리가 바란 것은 일손이었는데, 대신에 인간들이 왔다.”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쉬는 이민 및 이민자 정책에 대해 이같이 독설을 퍼부었다. 이주민들은 혐오와 독설에 짓눌려 제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한국 사회 역시.

영국에서 나서 인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생활해온 언론인 샘 밀러의 신간 『이주하는 인류』(최정숙 옮김, 미래의창)는 현대의 인류가 직면한 이민 문제를 고민하면서 좀더 근원적인 인류의 이동과 이주, 이민의 세계사를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인류사에서 이주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었으며, 간과되거나 오해를 받아왔다”며 역사 가운데 정지 상태, 정착 사회, 고정된 민족이나 국가 대신 이주, 민족 이동, 유동적 사회의 프리즘을 통해서 이동과 이주, 이주민의 세계사를 다룬다.

“나의 목표는 이주를 인류 역사의 중심으로 복귀시키고 이주민들에 대한 현대적 논의를 재설정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간은 본래 정주성을 추구한다는 현대적 통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9쪽)

책에 따르면, 이주와 이주민은 인류가 탄생할 때부터 있었다. 50만 년 전, 현생 인류의 친척인 네안데르탈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떠라 유럽과 아시아 곳곳으로 대규모 이주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응하지 못하면서 실패했다. 다시 10만 년 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서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전 세계에 퍼져 정착했고, 두 번째 이주는 성공적이었다.

먹거리와 거주지를 찾아 떠돌던 인류는 1만 년 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했다. 가장 먼저 이동을 멈추고 정착한 곳은 중동 메소포타미아였다. 이들은 수렵 채집인으로 시작해서 농부, 도시 주민으로 변해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도시 왕국 우루크의 포악한 통치자였고, 또 다른 주인공 엔키두는 야생 고지대에서 성장한 야만인이었다. 두 사람은 격투 끝에 친구가 되지만, 여기에서도 이주가 등장한다. 즉, 엔키두는 문명인이 되기 위해서 이주를 하고, 길가메시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자신의 정주지를 떠난다. 성경에서도 이동과 이주는 자주 나타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부터 시작해 대홍수 이후 인구 재건,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이나 바빌론 유폐 등에서 이주 현상을 볼 수 있다.

정착민들은 사유재산이 불어나면서 신분제를 만들었고 성을 쌓아 이주민과 자신들을 구별짓기를 시작했다. 정착민은 성 밖에서 생활하는 이주민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중국이나 인도, 이집트, 유럽의 고대 기록에서 이주민들이나 유목민들은 대체로 신뢰할 수 없거나 야만인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이동과 이주가 세계사를 바꾼 경우도 많았다. 고대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 역시 엄청난 규모로 이주를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와 흑해 주변에 270개 이상의 새로운 독립 정착지를 건설했다. 정복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야만인으로 여겼지만 그리스는 물론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며 대제국을 건설했다. 특히 현지인과의 통혼 정책을 추진하거나 거대한 이주 정책을 펴면서 세계사를 바꾸었다.

독일의 지하광산에서 일하던 한국인 광부
“도시를 정착시키고 인구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 반대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주시켜라. 그리고 가장 큰 대륙을 통혼과 친족 관계를 통해 화합과 우의로 이끌라.”(96쪽)

알렉산드로스 이후에도 정주민과 야만인의 대립은 계속됐다.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수천 년간 대립을 이어갔고, 로마도 야만인 취급하던 게르만인들과 계속 싸워나갔다. 중국의 압박을 받던 훈족의 이동은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서 고트족과 반달족 등 거대한 민족 이동을 촉발시켰고 결국 로마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슬람문명의 형성과 성장은 무함마드의 두 차례 이주와 연결돼 있고, 북유럽의 바이킹족은 대규모 이주를 결행하면서 캐나다를 탐험했고 영국과 유렵 여러 지역으로 이동해 중세 귀족의 중심부를 형성했으며, 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은 이동과 속도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세계 제국을 일구며 세계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대규모 대륙간 이주의 서막을 열었다. 미국은 유럽인을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서 건설됐고, 아프리카 노예들까지 강제 이주해오면서 세계적 강국의 길로 들어섰다.

많은 중국 이민자들은 동남아시아에 정착했고, 19세기에는 세계 거의 모든 곳으로 이동했다. 초기에는 상인과 장인으로 이주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노동자로 고용됐다. 특히 1850년에서 1910년 사이 약 40만 명의 중국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호황일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불황이 닥치자 중국 이민자의 입국은 금지됐고 곧 마녀 사냥이 이뤄졌다. 영국에서는 ‘푸 만추’라는 가공의 중국인 악당을 만들어진 뒤 황인종 위협론이 미국과 유럽을 강타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이동과 이주를 거듭해왔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오니즘과 함께 중동으로 대규모로 이주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노동과 고용, 생존과 자유를 위해서 국경을 넘고 있다.

저자는 선사시대 네안데르탈인와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 그리스와 로마의 정착지 건설, 알렉산더 대왕, 북유럽의 바이킹,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이주, 아프리카 노예무역, 푸 만추와 황인종의 위협, 유대인의 이주, 이주 노동자, 버락 오바마까지 인류의 이동과 이주, 이민의 역사를 들려줌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이주와 이민의 문제를 어떻게 근원적으로 풀 것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저자는 책에서 이주민을 받아서 나라가 부강해진 경우도 많았다고 분석했다. 스페인에 터를 잡은 무슬림 계열 우마미야 왕조는 고트족과의 통혼, 기독교인, 유대인, 바이킹까지 여러 인종을 받아들여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고, 열린 문화를 지향한 몽골은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대제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그렇다고 이주가 모두 유익하거나 삶을 풍요롭게만 해준 것 역시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온 초기 유럽인 이주민들은 그곳에 질병과 죽음을 가져왔고, 일본과 미국,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에 의해서 소수자로 전락하기도 했다고.

미국의 이민자 구금 시설의 모습.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이동과 이주는 불가피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앞으로 반세기 동안 이주는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유한 나라들은 인구 노화로 노동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더 많은 이민자를 필요로 하게 되며, 기후 변화로 인해 이민과 이주 욕구는 더욱 극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주 문제는 당면한 가장 중요한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고 역설한다.

“이주는 오늘날 아주 중요한 주제로 우리는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가나 국경, 여권, 이민 쿼터, 장벽, 비자 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좀 더 깊고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나는 이주 혹은 이민이 우리의 생활과 생각을 파고드는 모든 문제들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주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7-8쪽)

그러면서 인류는 고대부터 실용적이든 실용적이 아니든 다양한 이유로 이동과 이주를 계속해 왔지만, 정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어서 자주 그것을 잊는다고 지적했다. 인류는 수천, 수만 년 동안 지구의 거의 모든 곳으로 이주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온갖 시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류에게 이동과 이주는 운명이라고. 우린 모두 이주하는 인류라고.

“이주의 역사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인 유인원과 인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주민과 이주민 후손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모두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419쪽) 원제는 The Story of Us All.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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