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에 소상공인 상생공간 탄생
지난 7월 20일 서울 중구 산림동에 있는 ‘상생지식산업센터’ 개관식이 열렸다. 상생지식산업센터는 재개발로 밀려난 세운지구 일대 소상공인들이 재정착할 수 있도록 만든 임대공간이다. 서울 중구와 종로구에 있는 세운지구에는 전기, 전자, 금속, 인쇄, 조명, 공구, 통신, 자재 등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밀집해 있다. 세운지구 일대는 현재 8개 구역, 171개 부지로 나뉘어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소상공인들이 영업하던 오래된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 오피스 등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상생지식산업센터는 재개발로 인해 와해할 위기에 처한 이 지역의 산업생태계를 보존하려는 소상공인과 시민사회 요구에 따라 만들어졌다. 2020년 4월 서울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산림동 상생지식산업센터 건립사업 공동사업시행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와 LH가 90억원을 투입해 세운 5-2구역 내 LH 소유 땅에 공공임대상가를 짓고, 이를 세운 재개발지구 철거 세입자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하기로 했다. 현재 건물 1~5층 58개의 공공임대상가에 세운3구역 등에 있던 제조업체 일부가 입주한 상태다.
상생지식산업센터 건립은 재개발로 일터를 잃은 세입자들에게 해당 지역에 재정착할 수 있는 공공임대상가를 공급했다는 점에서 기존 정책과 차별점을 갖는다. 박은선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연구교수는 “현행 도시정비법에 따르면 재개발 사업 추진 시 임대상가를 주지 않는다. 상생지식산업센터는 도시정비법 개정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사례다”라고 말했다. 현행 도시정비법은 재개발과 관련해 임시상가 및 임대상가 설치에 관한 규정은 있으나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서 거의 추진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재개발이 진행되는 지역의 상가 세입자들은 강제퇴거를 당하면서 속절없이 일터를 잃게 된다.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더라도 개발 과정에서 이미 주변 임대료가 상승하기 때문에 폐업을 선택하는 사례도 많다. 박은선 교수는 “재개발 지역에서 상업이나 제조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상권과 일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개발 주체가 개발 구역 내에 임대 영업장과 재정착 과정에서 임시 영업장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싸워서 얻어낸 결과
상생지식산업센터는 세운지구 소상공인들이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등 시민사회와 함께 서울시와 중구청에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다. 30년 넘게 세운지구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해온 조무호 태광정밀 대표(세운 3-2구역 비상대책위원장)는 “2018년 강제퇴거가 진행된 재개발 첫 사업장인 3-1·3-4·3-5구역의 경우 세입자들은 그냥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청계천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워서 얻어낼 건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원들을 설득하면서 서울시와 중구청을 찾아다니며 공공임대상가 설치를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세운지구 소상공인들은 재개발에 반대하며 청계천 관수교 앞에서 1년 넘게 천막 농성을 이어가기도 했다. 홍영표 한국산업용재협회 서울지회장은 “상인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2019년 12월 7일부터 412일간 먹고 자며 농성을 이어갔다. 공공임대주택은 그 과정을 통해 얻어낸 것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세운지구 소상공인들과 시민사회가 반발하자 서울시는 도심제조업과 노포 보존 측면에서 재개발 관련 계획을 재검토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 2020년 3월 서울시는 세운지구 재개발로 영업기반을 잃게 된 세입자들에게 공공임대상가 700호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세운지구 세입자 재정착 비율을 60% 정도로 추산하고 이들을 위해 임시상가, 이주상가 등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또 소상공인들의 재정착을 지원하고 신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산업거점공간과 프로그램에 공공재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세운3구역 200호, 세운 5-2구역에 100호, 세운 5-1·5-3구역에 110호, 수표구역에 120호 등 모두 700호의 공공임대상가를 건립하고, 세운6구역에 서울메이커스파크·스마트앵커 등 산업거점공간도 구성하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정책의 첫 결실로 상생지식산업센터가 건립됐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안근철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활동가는 “공공임대상가의 전체수량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또 공정특성상 수직 구조의 건물에서는 실내에서 작업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 입주를 포기한 분들도 있다”라며 “세입자들을 재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정책이지만, 이런 부분까지 다 고려한 건물이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말했다.
상생지식산업센터 입주자들 사이에선 높은 임대료와 관리부실 등에 대한 불만도 나온다. 지난 4월 상생지식산업센터에 입주한 조무호 대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토로했다. 조 대표는 “새로 지은 건물이다 보니 이전보다 2배가량 높은 임대료를 내야 하고, 관리비도 많이 나와 (여름에도) 에어컨을 끄고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라며 “아직 간판이나 안내도도 없어 LH에 건의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상생지식산업센터의 사례를 눈여겨보고 있는 인근 상인들은 높은 임대료나 업체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 건물 구조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인근 제조업체 대표는 “가게마다 차이가 있지만, 월평균 80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있는데,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임대료만 오르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해당 지자체장이 바뀌고 해당 정책에 대한 시·구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산업거점공간 계획이 재검토에 들어가는 등 정책이 축소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안근철 활동가는 “사람만 건물에 입주한다고 산업활성화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애초에 이 계획은 서울시의 의지로 시작된 정책이고 LH는 큰 관심이 없던 것으로 안다”라며 “LH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서울시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한데 시장이 바뀌면서 이전 정책에 대해 서울시가 관심을 놓아버린 측면이 있다. 거점공간 등 재개발로 위축된 이 지역 산업생태계를 복원한다는 계획도 불투명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산업생태계 위축
2021년 11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8월 초쯤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 종로2가와 청계천을 보며,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며 “저렇게 10년간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도시행정을 한 서울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고 말했다. 오세훈 시장은 지난 재임 당시인 2006년 세운 상가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고 2009년 이 구역을 통합개발하는 재정비촉진계획을 수립했다. 박원순 시장 때는 주변 8개 구역을 171개 구역으로 분할하는 소규모 개발 계획으로 바꿨다. 현재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종묘와 남산을 잇는 1㎞의 녹지축을 만들며 주변에 초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안근철 활동가는 “초고층 건물의 경우 용도 면에서 산업용이 아니라 주거용이나 업무공간일 텐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라며 “결국 외곽으로 나가거나 폐업하는 분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세운지구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기계, 공구, 전기, 전자 등 상가가 형성된 곳이다. 자연스럽게 업종 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생태계가 만들어졌다. 2019년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세운3구역, 수표지구 500여 점포 중 321곳을 대상으로 벌인 ‘지역 기초조사 및 산업연계성 설문조사’에 따르면 세운지구 일대 입정동·산림동·장사동의 제조업체와 공구 도매업체, 수리업체 등이 유기적이고 수평적으로 얽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기술자가 서로 일을 나누거나 중간 매니저 역할을 하는 등 수평적 협력 관계로 협업 중이다.
재개발되면서 기존 상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산업생태계도 와해하고 있다. 조무호 대표는 “이주한 상인들은 주로 영등포나 파주, 남양주 등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아예 사업을 접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홍영표 지회장은 “공구 쪽 유통하는 업체를 1000여개로 추산하는데, 그중 10% 정도만 청계천에 남아 있다고 본다. 지금 연락이 안 되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20%는 폐업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구도 여러 분야다 보니 뚫고 자르는 기술, 용접하는 기술 등 다 전문화돼 따로 있다. 이것이 모여 생태계가 만들어졌다”라며 “인쇄, 공구, 방산시장 등 사실 이 일대 도심제조업이 다 연결돼 있다. 인쇄소 물건이나 기계가 고장 나면 우리에게 부속을 사가기도 하고 가서 수리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인쇄를 의뢰하기도 한다. 도심 산업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 결과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구축돼왔던 산업생태계 효과가 사라지고 있다. 박은선 교수는 “과거에는 이 지역에서 하루 정도면 완성됐던 공정이 아예 안 되는 사례도 많다. CNC 공정이나 주물공장이 많이 사라지면서 청계천에서 1~2일이면 끝났던 공정이 문래동이나 파주 등으로 택배를 보내고 다시 받으면서 3~4일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아졌다”며 “정확하게 비용을 환산할 수는 없지만 피해는 여기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에게 다 돌아가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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