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상장만 하면 끝? 화려한 데뷔 후 방치되는 좀비들
“‘상장만 하면 끝’이라는 인식이 투자자, 기업 사이에서 만연하다. 수많은 기업이 기업공개를 향해 달리는데, 상장 후 주가는 엉망이다. 기업공개 수만 늘리면 뭘 하나. 코스닥지수는 탄생 후 오히려 마이너스다.”
국내 증시에선 수천 개의 종목이 매일 거래된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종목은 총 949개,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종목은 총 1660개다. 코넥스 시장에 129개가 상장된 것을 더하면 총 2738개 종목을 거래할 수 있다. 어떤 종목이 어디에 상장됐는지, 이런 기업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 당연할 정도다.
매년 증시에 들어오는 기업 수도 늘어나고 있다. 2012년 한 해 동안 33개 종목에 상장했는데, 10년 후인 2022년에는 136개가 상장했다. 연말이 되면 이 숫자는 국가 경제 성장 지표, 증시 활성화를 위한 금융당국의 노력 등으로 표현된다. 상장 후 자금 조달의 편리함, 신용 상승 등을 누리는 기업 수가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매년 신규 상장기업이 늘어나는 게 보기 좋은 그림이다.
실제 한국거래소는 국내외 우수한 기업을 국내 증시에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상장 유치를 위한 전담 조직이 있고, 직접 기업공개 컨설팅도 한다. 해외기업 유치를 위한 기업설명회도 돌고, 기술특례상장 제도도 도입했다. 계속 기업이 상장해야 시장이 살아난다는 이유에서다.
기업 성장의 선순환을 도모한 점도 있지만, 뼈 아픈 부작용도 뒤따랐다. 우선 수많은 좀비기업이 탄생했다. 지난 28일 기준, 유가증권·코스닥시장에서 거래가 정지된 종목은 총 90개로 집계됐다. 하루 거래량이 1000주 미만인 곳은 55개, 1만주 이하인 곳은 227개로 나타났다. 전체 상장 종목의 10분의 1가량은 미미한 거래량으로 사실상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껍데기만 남은 상장사는 잦은 최대주주 변경, 메자닌 채권 발행 등을 통해 주가조작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상장만 하면 끝’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실제 사업은 부차적인 일이 되기도 한다. 벤처캐피탈은 기업공개를 통해 자금을 회수하고, 경영진은 벼락부자가 된다. 주관사는 상장 규모에 따라 수수료를 챙긴다. 그러니 기업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려 상장하는 게 서로의 이해관계에 딱 맞아떨어진다. 어떻게든 상장만 하면 되니 ‘몸값 뻥튀기’, ‘공모가 대비 반토막’ 등은 새내기주에 당연히 뒤따르는 수식어가 됐다.
벤처캐피탈의 자금회수를 위해 개미에게 주식을 떠넘긴 정황도 다수다. 지난 18년 동안 기술특례제도를 통해 190개의 기업이 상장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은 기업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신라젠, 셀리버리 등은 상장 당시 지금은 적자지만, 3년 후에는 영업이익을 내겠다며 미래 가치를 인정받아 상장했다. 결론적으로 애꿎은 개미만 피를 흘렸다.
이런 와중에도 금융당국은 상장 문턱을 낮추기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 28일 금융위원회는 특례상장을 위한 기술평가를 기존 2곳에서 한 곳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어찌 됐든 기술특례제도를 통해 상장하는 기업을 늘려 VC 자금회수 통로를 열어주겠다는 의도다.
물론 상장기업 수가 늘어야 돈이 도는 것도 맞다. 그러나 문턱을 다시 낮추기로 한 배경에는 의구심이 든다. 백여 개의 바이오기업이 기술특례제도로 상장했고, 허술한 연구개발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자 고삐를 조이기로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이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에서 상장 제도를 손질하라는 외부 압력이 거셌다는 풍문도 돌았다.
더 많은 기업이 상장해야 하는 이유 중엔 개인투자자의 공모주 투자도 있다. 최근 공모주 시장은 그야말로 도박판이기 때문이다. 신규 상장종목의 가격변동 폭이 공모가의 60~400%로 확대한 후, 껍데기에 불과한 기업인수목적회사(스펙‧SPAC)마저 수백 퍼센트 급등하는 이상 현상이 반복됐다. 기업공개로 큰 이익을 보는 주제는 따로 있지만, 매번 소고깃값을 벌 수 있다며 개인투자자 관심을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새내기주가 좀비기업이 되는 건 뒤로하고 말이다.
아직 주식시장의 체급은 크지 못했는데, 상장기업 수만 늘리는 게 선진자본 금융시장으로 가는 길인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 전 세계 자금이 몰리는 미국 증시의 경우, 매년 상장하는 기업 수가 줄어드는 추세다. 데이터플랫폼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뉴욕 증권거래소,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기업 수는 크게 변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2002년 엔론 회계 스캔들 이후 상장 관련 규제를 강화해 신규 진입장벽을 높였기 때문이다.
올해 3월 기준 뉴욕증권거래소에는 총 2385개의 기업이 상장됐고, 나스닥시장에는 3611개가 상장됐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종목이 국내 증시와 비슷하다. 그러나 시가총액으로 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6월 기준으로 뉴욕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은 25조달러(한화 3경1950조원), 나스닥시장은 21조달러(2경6838조원)다. 반면 코스피시장은 2000조원, 코스닥시장은 441조원 수준이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기업 수만 많고, 성장하고 있는 기업은 없다는 걸 의미한다. 기업 수가 너무 많아 돈이 분산되면서 제대로 클 수 없는 구조다.
상장 기업 수가 너무 늘어나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IPO는 수많은 자금 조달의 옵션 중 하나일 뿐인데, 하이에나 같은 투자자들은 한국에선 가장 유리한 게 IPO란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다른 옵션은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기업공개 시장이 과포화 상태란 걸 금융당국도, 투자자도 알고 있다. 상장만 목표로 두고 달리는 경기에 대회 심판 격인 금융당국마저 합세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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