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이상한 기명투표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IT 강국인 대한민국 국회에서 올 2월 상당히 낯선 장면이 연출됐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 개표 과정에서다.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시 기명투표 여부를 놓고 더불어민주당 내 여론이 끓는다.
국회 표결을 기명으로 하자는 민주당 혁신위의 제안은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IT 강국인 대한민국 국회에서 올 2월 상당히 낯선 장면이 연출됐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 개표 과정에서다. 찬성은 ‘가’ 또는 ‘可’, 반대는 ‘부’ 또는 ‘否’를 종이에 써서 의사를 표시하는데, 일부 글씨가 애매해 판독에만 1시간 이상 걸렸다. TV에 살짝 비친 투표용지에는 ‘부’ ‘우’ ‘무’로도 읽힐 수 있는 이상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무기명 뒤에 숨은 ‘유약한’ 소신이 무의식 중에 발현된 것이라는 시니컬한 해석이 나왔다.
대통령 탄핵 소추, 국무위원 해임 건의를 비롯해 국회 내 각종 인사와 선거 관련 사항은 무기명투표 대상이다. 국회의원 체포동의안도 ‘인사’에 포함돼 무기명에 부친다. 과거 독재나 권위주의 시대에는 신원이 드러나지 않는 무기명투표가 국회의원을 보호하는 방패였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의원 과잉 특권의 시대다. 영국과 일본 의회에도 무기명투표가 있지만 매우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미국 의회에는 아예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표결 때 한국에선 무기명으로 진행된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인 미국에선 기명이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선택조차 익명 뒤에 숨는 게 옳은가.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시 기명투표 여부를 놓고 더불어민주당 내 여론이 끓는다.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1호 쇄신안으로 불체포특권 포기를 제시한 데 이어 체포동의안 표결방식을 기명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데 따른 논란이다. 당밖으로 새는 목소리는 주로 비명계 반발이다. 이달 중으로 예상되는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반명 세력인 일명 ‘수박’을 골라내려는 음모라는 것이다. 이 대표가 혁신위에 힘을 싣는 데다 공천룰 개정이 불리하게 진행될 조짐까지 보이면서 비명계 의구심은 커진다.
국민과 국회의원은 경영학에 나오는 ‘주인-대리인 이론’의 대표적 사례다. 누가 어떤 투표를 했는지 아는 것은 대리인인 국회의원을 뽑은 국민의 기본 권리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생각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국회의원을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 표결을 기명으로 하자는 민주당 혁신위의 제안은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그 당연한 주장이 평시가 아니라 특정 표결을 앞둔 시점에 불거지니 의도를 의심받는다. 차라리 혁신위가 모든 표결을 기명으로 하자고 나왔다면 어느 정도 진정성은 인정받았을 것이다. 기명투표라는 옳은 방향이 이상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 같아 혀를 차게 된다.
강필희 논설위원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