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8] ‘보수 우파’ 아니라 ‘자유 우파’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이 나무를 쓰러뜨리는 법에 관해 읽은 기억이 있다. 매일 나무 앞에 몰려가 나쁜 말을 소리치면, 나무는 시들어가다가 죽고, 넘어진다. 이게 정말 그러는 건지, 문학적 서술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의 힘’에 대한 진실임은 분명하다.
성경은 구약(舊約) 시대와 신약(新約) 시대로 구분된다. 개신교 원리에 따르면, 예수의 등장으로 구약은 폐기되고 인간은 신약의 세계 속을 살아가고 있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이론의 구약이라면,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것의 신약을 열었다. 주요 인물을 검토하다가 문득, 아, 이 사람이 이래서 그럴 수 있었던 거구나 하고 자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역사의 종말’ 저자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학부에서 고전학을, 석사과정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다는 것,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 카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제정치학자였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토리노대학교 장학생으로 ‘언어학’을 전공했다. 중퇴 전까지만 해도 언어학 교수가 되는 데에 진지했다. 언어의 본색과 주술성(呪術性)을 알지 못했다면 그람시의 문화 헤게모니, 문화 진지전(陣地戰) 같은 ‘혁명 전략’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은 문화 지배에 의한 대중의 ‘자발적 추종’으로 전환됐다. 문화를 무기 삼아 그 사회의 상식을 교체해버림으로써 혁명을 쟁취한다. 그람시는 이런 얘기를 감옥에서 대학 노트 서른두 권 2848페이지에 이르는 필사본 ‘옥중 수고(Prison notebook)’로 남겼고, 이 책은 지금 21세기의 한국 사회마저 장악하고 있다. 다만 ‘386적 대중’이 그 사실을 공기처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무솔리니의 검사는 다음같이 선고했다. “이 자는 천재라서 너무 위험하다. 이 자의 두뇌를 가둬둬야 한다.” 그람시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했다. 책이란 게 이렇게 무섭고, 이래서 작가는 죽은 뒤 진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밉다고 죽이면, 더 강해진다. 언어만 교정해도 정치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진보와 보수는 정책 사안이고, 좌익과 우익은 이념에 속한다. ‘진보(progress)’는 정주(定住)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몸이 타락하고 자폐적이면 다른 몸으로 이동해버리는 영혼과도 같다. 고로, 수구(守舊) 좌파와 진보(進步) 보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사회는 진보 좌파, 보수 우파 이런 말을 마치 무슨 고유명사처럼 사용한다. 자본주의는 자유시장경제로, 민주주의는 민주제도로, 보수 우파 대신 ‘자유 우파’가 적절하다. 이런 예는 끝이 없다. 언어 조작이 기반인 문화 최면에 홀려 상식 대접을 받게 된 거짓들을 타파해야 한다. 그래야 이 사회의 좌파도 우파도 공히 건강해질 수 있다. 우리는 언어에 병들고 무너지는 나무인지도 모른다. 도끼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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