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한 교사의 죽음과 우리가 해야 할 질문

2023. 7. 31.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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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시장화된 교육, 갈등·폭력 양산
교사들 서비스 제공 감정노동자로
학생은 점수에 따른 등급화로 차별
90% 탈락자 만드는 시스템 바꿔야

나는 사범대학의 교수다. 그 전엔 10년간 중등학교 교사였다.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현직 교사의 고충을 듣고 있으며 그들의 보람과 기쁨도 곁에서 보고 있다. 4학년 교육실습 기간엔 중·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십 대의 학생과 교사, 교장도 만난다. 그래서 이번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삼수 끝에 교원 임용고시에 붙은 제자가 있었다. 제자는 3년간 근무하고 사직했다. 교직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아니었다. 제자는 학교라는 시장에서 갑질 소비자를 견디지 못했다. 학교가 시장이 되면 학생과 학부모는 소비자가 된다. 교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감정 노동자가 된다. 제자는 교직을 사랑했으므로 학교의 시장화에 적응할 수 없었다. 자신을 서비스 제공자로 전락시킬 수 없었다. 학부모와의 상담을 민원처리로 실추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학교 시장화의 부조리에 저항했기에 학교에서 부적응자가 된 것이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경쟁이 있는 곳에 시장이 생긴다. 시장은 구매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나눈다. 여기서 갈등과 폭력이 발생한다. 학생 간 폭력, 교사와 학생, 학부모 사이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양극화로 인한 좌절과 긴장의 징후다. 우리는 지금 교육을 시장으로 만드는 정부와 시스템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학생은 점수에 따라 등급화된다.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더 효율적인 교육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 점수에 따라 등급화되므로 이것을 공정하다고 보는 건 착시다.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포함돼 있고 수능에 나오는 내용만이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내용은 이미 상징자본을 많이 축적한, 혹은 경제자본으로 상징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급에게 최적화돼 있다. 교육과정은 계급을 세습하고 계급 간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교육의 공정성을 이유로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표준화된 시험을 객관적 기준으로 환원한다. ‘공정한 교육과 평가’ 때문에 불공정과 불평등이 영속된다.

학생을 ‘구분’하기 위해 대학 입시에 킬러·준킬러 문항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난센스다. 대학 입시라는 선발·선별을 위해 점수는 정규분포곡선을 그려야 하고 이를 위해 초고난도 문항은 불가피하다는 것은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애초에 차단한다. 목적은 없고 차별만 있다. 결국, 학벌에 따라 임금과 계급 격차가 결정되는 현실을 인정하자는 꼴이다. 소모적인 무한 경쟁과 청년 실업, 소외층의 절망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서이초 교사의 자살은 과잉된 학생 인권 때문이 아니다. 교사의 인권 보장은 학생의 인권을 잘라내고 얻을 수 있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한 교사의 죽음을 교사 대 학부모 갈등으로 축소하는 틀은 갈등의 무한 증폭을 불러올 뿐이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의 악성 민원을 고발하고 미투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권은 상호 관계에서 발생한다. 어느 한쪽의 인권이 강조되면 다른 쪽의 인권도 실현되지 않는다. 인권은 강제와 명령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윤리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권 보호는 학생 인권도 보호한다. 학생을 무분별한 신고 가능성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신고할 수 있다’는 전제는 학생이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한다. 학생이 교사를 ‘신고’할 수 있다면, 그 권리를 남용할 수 있다면, 그 권리로 교사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전제로 교실에 앉아 있다면 학생은 자기 자신을 교육의 경계 바깥으로 내몰게 되는 셈이다.

이십 대, 나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남녀 공학이었다. 내가 담임을 하고 있던 반에서 남녀 교제, 성 관련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이 아니라 은폐였다. 두 학생에게 전학 처분이 내려졌는데 거기엔 학생 상담도 사후 교육도 없었다. 담임인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모든 일은 내가 모르는 사이 이루어졌다. 나는 두 학생과 격리된 셈이었다. 교장은 내게 시말서를 쓰지 않게 해준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이 고통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이후에, 한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게 미안하고 감사하다 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절망할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히 보였다. 나는 시말서를 쓰고 그 모든 과정과 절차를 복기해야 했다. 나 자신과 학교, 교장·교감과 교육 환경을 비판해야 했다. 나는 학생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공모자, 가해자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밀려났으므로 피해자였다.

대통령은 교육 혁신을 약속했다. 지금이 그때다. 수능 킬러 문항을 없애자는 대안은 오히려 문제를 희석하고 기존의 경쟁 시스템, 교육의 상품화·시장화를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1%, 혹은 10%의 엘리트를 구분 짓기 위해 99%, 90%의 탈락자를 만드는 이 시스템이 정상일까. 그때 나의 학생들도 그 90%에 있었다. 탈락은 학생 개인의 무능 때문이 아니다. 제한된 계급에게 유리한 제한된 교육 내용과 평가 때문이다. 여기서 잠재적 탈락자는 또 다른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잠재적 성취자다. 나는 이 수많은 성취자를 위한 교육을 꿈꿀 것이다. 그래서 이 ‘90%를 위한 교육’이라는 말도 틀렸다. 그들은 어떤 수치에 포함되는 익명의 대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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