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서 쏟아져나온 황금유물들… 비화가야의 비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지난 30년간 가야사 연구가 본격화하면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고령에는 대가야가, 창녕에는 ‘비화’가 있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다만 경남 창녕에 웅거한 비화가 가야 일국이었는지, 혹은 신라의 지방세력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만약 비화가 가야라면 그 나라의 실체는 어떠했고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세계유산 등재 앞둔 가야고분군
이 고분군은 올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릴 예정인 유네스코 회의에서 가야 여러 고분군들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이 확실시된다. 우리 정부는 등재신청서에서 이 고분군을 비화가야가 남긴 것으로 명기했지만 이 고분군 조영 주체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다.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1918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해 10월 조선총독부 촉탁 우메하라 스에지 일행은 교동고분군을 찾아 며칠 만에 2기의 무덤을 발굴했다. 그중 31호분에서는 금귀걸이 1쌍을 비롯해 100점 이상의 토기가 쏟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굴한 무덤을 가야 고분으로 여기면서 후에 발굴품을 임의로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유물들은 우여곡절 끝에 1967년 국내로 환수됐다.
그해 12월에는 고적 조사의 다른 팀 멤버였던 조선총독부의 야쓰이 세이이쓰 일행이 창녕에 머물면서 크고 작은 무덤 몇 기를 파헤친 데 이어 이듬해 초에 재차 창녕으로 내려와 고분 발굴을 계속해 모두 10여 기의 무덤을 조사했다. 훗날 우메하라는 야쓰이의 발굴에서 “마차 20대, 화차(貨車) 2량을 충당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방대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회상했다.
이 시점의 발굴은 도굴을 촉발했다. 1930년 도굴 신고를 받고 현지를 찾은 총독부 직원은 깜짝 놀랐다. 미발굴된 고분들 대부분이 도굴로 훼손돼 쑥대밭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도굴된 유물들은 오구라 다케노스케, 이치다 지로 등 대구의 일본인 수집가들 손으로 흘러들었고 다수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 가운데 중요 유물들이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일본산 녹나무 목관과 소녀의 인골
창녕 지역 고분군이 재차 조명받은 것은 2004년의 일이다. 그해 4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교동 고분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리 상태가 좋지 않은 송현동 고분군을 정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굴에 나섰다. 대상은 6호분과 7호분인데, 마치 경북 경주의 황남대총처럼 두 기의 무덤이 연접돼 표주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발굴을 마무리하기까지는 2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두 무덤 가운데 늦은 시기에 축조된 7호분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조사단은 6호분과 7호분 발굴을 마무리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2년 계획으로 15호분과 16호분 발굴을 시작했다. 두 무덤 역시 표주박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15호분은 여러 차례의 도굴로 내부가 교란된 상태였다. 무덤 안에서 남녀 2인씩 모두 4인의 순장자 인골이 드러났다. 3구는 훼손이 심했지만 여성 인골 1구는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발굴이 끝난 후 고고학, 유전학, 법의학 전문가들이 공동연구를 진행해 인체를 복원하고 그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연구를 통해 ‘송현’의 키는 153.3cm, 나이는 만 16세로 추정됐고 사망 원인은 중독사 또는 질식사라는 결론이 도출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고대 창녕, 가야인가 신라인가
이 고분군 조영 주체를 비화가야로 설명하는 연구가 많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대 창녕에 웅거한 정치 주체가 비화가야인지 혹은 일찍이 신라에 복속된 지방 세력인지를 확정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비지국(比只國), 삼국지 동이전의 불사국(不斯國)의 위치를 창녕으로 비정하면서 그 나라가 일찍이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비자발(比自㶱), 삼국사기의 비사벌(比斯伐)을 비화가야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단편적 기록을 보완해 줄 자료가 창녕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다. 가장 큰 논점은 이른바 ‘창녕양식 토기’를 독자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지역을 가야로 볼 것인가, 혹은 그것을 신라 토기의 지방 양식으로 보면서 창녕을 신라의 지방으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신라양식 금속공예품을 신라 왕이 지역 유력자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볼 것인가, 혹은 비화가야 지배층이 자국의 생존을 위해 신라에 손을 내민 결과로 볼 것인가 하는 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창녕 지역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가 이러한 논란의 끝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유산 등재가 장차 관련 연구의 진전을 이끌어 머지않은 장래에 창녕 지역 고분군 조영 주체를 둘러싼 학계 및 지역사회의 오랜 숙제가 해소되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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