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말하며 분단독립 추구…적대적 평화는 현재진행형[정전 70년 한반도 영구 평화를 향해]
7·4 남북공동성명은 상호 체제의 이격과 강화를 통한 분리를 추구한 분명한 계기가 되었고
남북이 접촉과 대화를 할수록 상호 체제에 대한 인정과 수용의 정도는 더 넓고 깊어졌다
해양과 세계를 택한 한국과 대륙과 이웃을 택한 북한…박정희와 김일성의 ‘경쟁’은 결국 기울어진다
전후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실패는 뼈아프지만 제2의 한국전쟁 방지와 번영은 최대의 성공
모순적인 이중상황을 넘어 평화와 번영의 ‘선순환 구조’를 창출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일군의 이론들에 따르면 의지의 표현과 언어 사용에서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평화 상태보다는 전쟁 상태로 이해한다. 그러한 기준으로 보면 전후 정전 상태 아래에서 남한과 북한은 전쟁 상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상황을 기준으로 보면 대규모 무력충돌이 없어 실질적인 전쟁의 부재라는 현실은 평화 상태에 가까웠다. 둘을 함께 볼 때 전후 한반도는 전형적인 이중상황으로서 적대적 평화 상태에 가까웠다. 그런 이중상황 속에서 전후 한국과 조선의 거시적 관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선언과 법제에서는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정책과 내면은 분단독립을 추구하였다.
우선 이승만-김일성 시기는 남북관계 관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강력하게 정전을 반대하였다. 정전은 상응하는 대가 없이는 결코 수용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공식적인 정전 합의를 통해 불법적 침략 행위와 집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승만에게 그것은 합법적인 중앙정부 대한민국이 괴뢰 집단과 대등하게 협상하고 서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나아가 정전협정 서명은 훗날 기회가 왔을 때 공산 괴뢰를 타도하는 통일 시도를 금압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제공해준 절호의 통일 기회를 놓친 그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전협정 서명은 미국에 한반도 평화의 도래를 이유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미루거나 회피할 명분을 줄 수도 있었다.
복합적인 전략과 이유에서 일련의 정전 과정과 협정 합의에의 적극적 참여를 거부하였던 이승만으로서는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한 위치에서 볼 때 전쟁 직후 침략자 북한을 인정하고, 그리하여 북한과 마주 앉는 남북관계나 남북 대화의 인식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침략전쟁을 결행한 김일성 역시 북침의 주체로 왜곡하고 공격해온 한국 정부를 인정하고 1대1로 대면·대화한다는 인식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54년 정전협정의 후속 조치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원문 그대로)가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논의할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당시로서 이는 주목할 만한 제안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한다.
문명·종교·진영·이념 충돌의 경우, 특히 한국전쟁처럼 세계내전일 경우 외부와 연결된 내부 동족은 더더욱 서로를 척결과 절멸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한국과 조선에서 각각 상대를 향한 괴뢰·주구·앞잡이라는 낙인은 이를 압축하는 표현이었다. 그렇게 부르는 동안 동족의 절반은 외세·이민족·이방인과 연결되어 나머지 절반을 파괴하려는 꼭두각시로 인식된다. 한국과 조선의 경우 각각 전시와 전후 초기 공산주의 진영의 우두머리 제국 소련과 자본주의 진영의 우두머리 제국 미국의 괴뢰로 인식되었다. 대면과 대화 관계의 형성 자체가 불가능한 연유였다.
따라서 전후 초반 이승만과 김일성 시기의 남북 대결과 경쟁은 구호와 이념, 도덕성과 정체성 위주였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정희 시기의 대결은 이념에서 실용으로, 관념에서 현실로 변모하였다. 어느 체제가 국민에게 더 좋은 삶의 조건과 결과를 제공할 것인가의 체제 능력 대결로 전이하였던 것이다. 관념이 아닌 현실의 경쟁을 전개하자 승패는 한쪽으로 확실하게 기울기 시작하였다. 물론 전혀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정전체제 동안 국가 간 전쟁행위는 없었지만 무력충돌 자체가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충돌은 빈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격돌 직전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격렬한 유혈충돌 ‘작은 한국전쟁’
실제로 1967년과 1968년의 경우 ‘제2의 한국전쟁’ 또는 ‘작은 한국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격렬한 유혈충돌이 발생하였다. 전후 가장 심각한 위기였던 당시 비무장지대에서의 총격전은 총 379건에 달했다. 2년 동안 평균 이틀에 한 번꼴로 빈번하게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2년간 사망자는 한국군 260명, 미군 33명, 북한 인민군 359명에 달했다. 쌍방에서 평균 1일에 거의 1명씩 사망할 정도의 심각한 충돌이었다. 두 해 동안 체포된 북한 간첩은 무려 2032명이었다. 1969년에는 한 해 동안 미군 사망자가 36명에 달했다.
북한이 남한의 체제 전복을 위하여 국경 충돌과 내부 침투의 양동작전을 집요하게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경 충돌과 내부 침투의 차원을 넘지는 않았다. 심각한 국경 충돌과 체제 전복 기도에도 불구하고 1967~1968년 전쟁이 없었다는 점은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국가 지도부나 국제 지도자들의 결정행위와 결정과정이 없다면 전쟁은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한국전쟁 때와는 달리 조선은 1967~1968년에는 전쟁을 결행하지 못했다.
체제 능력을 경쟁하던 시기에 남과 북은 한편으로는 명확한 제압과 타도의 의지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한 인정과 수용의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직접 전쟁을 지휘하였던 지도자들인 이승만-김일성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 점은 매우 뚜렷하였다. 특히 남한이 체제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통일 대신 평화로 이행하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박정희·전두환은 물론 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부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본질적 차이를 갖지 않았다. 남북 공존으로의 움직임을 말한다. 다만 민주화 이후 시기 동안 강경 대북정책을 구사한 보수정부일수록 통일을 더 강조하고, 온건 대북정책을 구사한 진보정부일수록 평화를 더 강조한 점에서는 달랐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볼 것이다.
남과 북에서 정부 간 ‘공식 대화’와 최초의 ‘평화통일 원칙 합의’ 이후 상대와의 정면 대결을 위해 모든 자원과 역량을 최대한 집중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신체제와 주석체제를 거의 동시에 등장시켰다는 점은 7·4공동성명이 상호 체제 이격과 강화를 통한 분리를 추구한 계기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조선은 주석체제로 이행하면서 1948년 이후 유지해오던 헌법상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꿨다. 허구의 중앙정부 주장, 즉 중앙성을 포기하는 대신 실제의 분단독립, 즉 독립성을 공식화·헌법화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헌법에 최초로 평화통일 조항을 삽입하였다. 한국 역시 1972년 유신헌법에서 평화통일 원칙과 조항을 처음으로 헌법에 삽입하였다. 대결과 분립으로의 전환 시기에 각각 헌법에 평화통일 원칙과 내용을 삽입하였다는 점은 모순과 역설이었으나, 그 모순과 역설이 남북관계와 한·조관계를 가르는 본질이었다.
이후 근본법인 헌법을 고치면 고칠수록 두 체제의 가치와 목표, 성격과 내용은 물론 역사적 기원과 상호 인식도 점점 멀어졌다. 즉 상호 이질성과 멀어짐의 조문화와 공식화가 두 나라 헌법의 긴 개정 과정이었다. 따라서 헌법에 새로 들어간 통일 정신과 조항은 구체적 현실이 아니라 추상적 규범의 의미를 넘지 못하였다. 헌법상 두 국가의 역사적 뿌리 역시 완전히 갈라섰다. 한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언급하고 있음에 반해 조선은 항일무장투쟁을 말한다. 민족도 한쪽은 한민족임에 비해 다른 한쪽은 조선민족을 거쳐 끝내 김일성민족으로 나아갔다. 민족마저 공식적이며 공개적인 분리였다. 김일성민족에 한국 국민이 포함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만약 민족과 통일의 실질성을 내포하였다면 이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반민족적 명명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김정은 시대 들어 우리민족제일주의마저 내려놓고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천명하였다. 이때 말하는 국가는 당연히 조선을 말한다.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국가가 먼저라면 우리민족은 배제된다. 조선에 있어 이것은 새삼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바로잡았을 뿐이었다. 현재가 과거를, 국가가 민족을 실제에 맞춰 창조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국가를 넘어 이제 민족까지 두 개로 분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는 철저히 민족보다 국가를 우선하고 있다. 헌법도 김일성헌법을 거쳐 김일성·김정일헌법이 되었다. 세계 초유의 부자(父子)헌법이 된 것이다. 완전한 개인헌법·가족헌법·세습헌법이 되었다. 인류가 근대국가 체제를 갖추게 된 이래 단연 사상 초유의 국가요 헌법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롭게도 남북회담을 비롯해 접촉을 진행하면 할수록 호칭부터 합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상호 체제에 대한 공식 인정과 수용의 정도는 더 넓고 깊어졌다. 둘의 합의와 규정에서 호칭은 처음에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남·남측과 북·북측을 거쳐, 이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이제 두 당국 간 합의 문서와 공식 호칭에 한국과 조선을 명기하는 것은 일반이 되었다. 그러는 동시에 헌법적·정치적·군사적·이념적으로 두 체제는 더욱 멀어졌다. 접촉을 반복하면 할수록 ‘남한과 북한’ 및 ‘남북관계’는 인식과 합의의 측면 모두에서 ‘한국과 조선’ 및 ‘한·조관계’로 변전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분단된 조국’이나 ‘갈라진 조국’과 같은 표현조차 사라졌다. 표면과 이면 모두에서 한·조관계의 명문화와 실질화였다. 초기의 상호 부인과 ‘괴뢰’ 규정에서, 남북관계를 지나, 한·조관계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상호 공식 인정과 분단공존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적대감과 무력경쟁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서는 다시 상술한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대결과 경쟁’
김일성이 한국전쟁이라는 무력침공을 통해 여순사건으로 사형선고와 무기감형을 받았던 박정희를 자기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국군에 복귀할 길을 터주고, 나아가 남북의 생사투쟁 덕분에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군부쿠데타의 무혈 성공과 권위주의체제의 등장에 기여한 뒤, 체제 능력 경쟁 시기에 치열한 남북 체제 및 국력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한국과 조선의 거시적 관계에서 가장 혹독한 역설이었다. 본격적인 근대화 경쟁을 시작한 박정희와 김일성 두 사람의 출발점에서 남한과 북한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2달러 대 195달러였으나, 둘의 경쟁 종료 시점에는 1640달러 대 1114달러였다. 완전한 역전이었다.
박정희와 김일성 시기의 격렬한 대결을 지나면서 남북의 국력 경쟁은 확고하게 기울어졌다. 한국전쟁은 남북의 이념과 가치, 체제와 국력 경쟁에서 북한을 패배와 고립으로 이끈 결정적인 배경이자 원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남한 타도가 아니라 거시적인 남한 발전과 번영의 분명한 반면적 원인 요소였다. 또한 남북 통일의 계기가 아니라 남북 분단과 적대, 남북 분리와 독립의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체제와 심성 대결의 고착을 넘어 발전의 방향과 내용마저 두 국가로 나아가도록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조선의 폐쇄와 국제적인 고립 역시 이 전쟁의 산물이었음을 고려하면 김일성 지도부의 잘못된 무력통일 시도가 스스로에게도 막대한 손실과 낭패를 초래하였음에 틀림없었다. 국내 체제, 남북관계,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조선에 가장 심대하고도 장기적인 피해를 입힌 사건은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자기패배와 자기고립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득을 보았다면 허위의 북침 왜곡을 통해 개인적·가족적으로 장기독재와 세습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가문뿐이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명분주의 대 박정희의 현실주의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였지만, 더 크게는 민족에 갇힌 조선과 세계를 향한 한국의 차이였다. 동시에 당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세계 경쟁의 한반도적 발현이기도 하였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당시 서독은 동독보다, 대만은 중국보다 크게 앞선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진영과 세계체제에서의 위치가 냉전시대 체제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전쟁 중인 두 베트남을 빼고는 냉전 시기 두 체제의 근접경쟁은 모두 자유진영 국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두 세계를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경쟁이 후자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징조는 이미 두 한국과 두 독일과 두 중국의 경쟁 도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 체제의 승패를 가른 가장 큰 이유는 상호 대면 경쟁과 정책 영역이 아니라 다른 요인들 때문이었다. 이 점은 주목을 요한다. 하나는 민주적 제도와 참여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로의 진출이었다. 먼저, 북한의 심각한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지된 복수정당과 주기적 선거를 포함한 최소한의 민주적 외양과 제도, 그리고 권위주의 체제에 도전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은 한국의 발전과 체제경쟁의 승리를 추동한 핵심 요인이었다. 이 두 가지 점이 한국과 조선의 체제를 가르는 근본 차이였다.
전쟁이 설정한 국제적 위치의 초기 정초(定礎) 역시 결정적이었다. 한국이 해양과 세계를 택하였음에 비해 조선은 대륙과 이웃을 택하였다. 전후 이승만 시기 이래 한국의 정부들은 해양과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자발성과 세계 무대가 만나자 한국인들의 높은 문명 성취의 저력과 경험이 다시 분출하기 시작하였다. 5대양 6대주로의 넓은 문이 열리자 응축되어 있던 자질과 능력, 근면성과 진취성이 폭발하였던 것이다.
자부심과 당혹감 속 우리의 과제
그런 점에서 휴전선으로 인한 정전체제 아래에서 대륙 - 특히 당시는 공산대륙이었다 - 과의 폐색과 단절은 오히려 세계 진출 및 세계 연대를 통해 대한민국의 해양국가성과 국가 발전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셈이었다. 이는 전통과 근대 시대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유사 이래 대륙보다는 바다를 차지하고 바다로 향한 국가와 민족이 더욱 발전하였음에 비추어 보면,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의 대전환은 한국의 발전과 도약의 결정적 계기였음에 틀림없었다.
전후 한반도에서 최대의 실패는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실패이지만, 동시에 최대의 성공은 제2의 한국전쟁 방지와 번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로서는 상당한 자부와 당혹감을 함께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 자부와 당혹의 주체와 영역이 같지 않았기에, 한반도에서 이중상황을 넘어 평화와 번영의 선순환 구조를 창출해야 하는 과제는 아직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필자 박명림 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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