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기관 예산 삭감에 대한 우려
[세상읽기]
[세상읽기] 이철희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한국이 직면한 인구 위기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 문제 해결에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면서 적극적인 정책적 노력을 약속해왔다. 그러나 인구 위기의 징후는 더욱 뚜렷해지고, 성공적인 대응의 증거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하게 몰라서? 문제는 알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잘 몰라서? 방법은 알지만 이를 실현할 역량과 의지가 부족해서?
무엇이 인구 위기 대응의 가장 큰 애로인지 정확하게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한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 초미의 관심사였고 많은 연구와 조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지만, 여전히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사안도, 잘 들여다보면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거나 구체적·효과적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만큼 세밀하게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충분히 잘 알지 못하면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어도 인구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필자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엄밀한 연구와 조사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시작점일 것이다.
연구와 조사가 합리적인 정책 수립의 기초라는 점을 생각할 때, 국책 연구기관을 포함한 공공기관의 예산을 삭감하기로 한 정부의 최근 조치는 우려스럽다. 약 한달 전, 정부는 전체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2024년 예산 30%를 삭감하는 안을 제출하도록 했다. 필자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이번 조치는 공공기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부 지출을 절감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목적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연구기관 예산 삭감은 몇가지 면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시기와 속도이다. 국책 연구기관들은 2024년도 연구를 지난해부터 준비해왔고, 그 주제, 내용, 예산 등이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지금 내년도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면 연구 수행에 상당한 혼선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계획된 연구의 일부는 취소해야 할 것이고, 나머지 연구도 축소·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삭감한 예산안을 불과 며칠 내에 제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연구기관이 합리적으로 연구 계획을 조정할 여유가 부족했을 것이다. 설사 연구 예산 삭감 조치가 꼭 필요했더라도, 적절한 준비와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일정이 바람직했다.
둘째는 예산 삭감 방식이다. 모든 기관에 대해 같은 비율로 예산을 삭감하는 방식은 행정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재정 지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불합리하다. 해당 분야 연구에 대한 수요, 재정적인 여건, 연구 성과 면에서 모든 연구기관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따라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서 연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가 연구 예산의 분야 간, 기관 간 합리적인 배분 방안을 충분히 검토한 뒤 이를 반영했어야 했다.
셋째는 잠재적인 부정적 영향의 문제이다. 연구의 질적인 성과와 종합적인 공헌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투입되는 예산의 규모만 따지는 것은 재정 효율성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산 삭감은 다양한 경로로 연구의 질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조사연구는 애초 계획했던 사례 수를 줄여야 할 것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연구 방법은 꼭 필요해도 도입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예산 부족으로 연구인력 채용을 줄이는 경우, 이는 장기적인 연구역량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의 질과 신뢰성이 낮아지는 현상은 즉각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조용히 누적되면서 결국 정부 정책의 질을 떨어뜨리고 정책 실패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양질의 정책 연구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위기를 예방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평가가 다양할 수 있겠지만 국책 연구기관은 기초적인 데이터를 생산하고 정부 정책 수립의 이론적, 실증적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성과를 엄밀하게 평가하여 연구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에게 더 나은 연구를 수행할 유인을 주는 작업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섣부른 예산 삭감으로 인해 연구의 질이 낮아지고 정책 연구의 기반이 무르게 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적인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무작정 아끼기보다 잘 쓰는 것이 더 현명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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