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대타협’ 네덜란드 모델 언급에 언론·기업들 화들짝
‘임금인상 자제-노동자 경영참여’
네덜란드 모델 필요성 밝히자
언론들 큰관심·삐딱한 몰아가기
네덜란드 통상장관 인터뷰하고
“노동자 경영참여 부정적” 보도
정작 당사자는 “전혀 사실 아냐”
연합뉴스 논설위원들과 점심
보수적이고 오만한 인상 풍겨
언론계 상층 공통적으로 보수적
참여·타협이 함께 사는 길인데
경총·전경련에 양대노총도 반대
‘사회적 대타협’ 언제쯤 이룰까
2003년 7월1일(화) 청와대브리핑 팀에서 노사문제를 묻기에 네덜란드 모델을 언급했다. “종래의 대립, 투쟁적 노사관계를 극복해야 한다. 네덜란드와 같이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의 권리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경영참여’를 보장하는 윈윈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소 소신을 이야기했는데 뜻밖에 이날 밤 문화방송(MBC) 9시 뉴스에서 청와대 노동정책이 유럽모델로 정해졌다고 보도했다.
7월2일(수) 조선일보가 네덜란드, 아일랜드 특집을 실었고, 중앙일보는 인터뷰를 게재하는 등 거의 모든 신문에서 네덜란드 모델을 대서특필했다. 소동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가기에 7월3일(목) 오후 4시 춘추관에 나가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 앞에서 경제가 어려워 ‘유럽의 병자’, 혹은 ‘네덜란드병’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1982년 노사가 바세나르협약을 맺어 ‘네덜란드의 기적’을 일궈냈다고 설명했다. 국제경쟁이 치열해지고 중국경제가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노사가 한걸음씩 물러나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은 노동자 경영참여에 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나는 ‘모든 나라에서 경영참여를 하고 있는데 다만 수준이 다를 뿐이다. 유럽이 가장 적극적이고 미국, 영국은 소극적이다. 한국은 노사협의회를 통한 참여가 있으나 수준이 낮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7월4일(금) 오후 3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초청 간담회에서도 불경기, 지방균형 발전, 금융, 어음 문제, 인력 수급, 임금, 노사문제, 그리고 네덜란드 모델을 언급했다. 이어 중소기업가 10명이 발언하는데 대부분 정부 지원 요청이었고 스스로 애국자라고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이들의 경제인식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나는 무수히 많은 국내외 기업가들을 만났는데, 외국 기업가들이 훨씬 개방적, 합리적, 진보적이어서 놀라웠다.
7월9일(수) 12시 연합뉴스 논설위원 10명과 점심을 먹었다. 화제는 온통 네덜란드 모델에 쏠려 완전 네덜란드 청문회가 됐다. 논설위원이면 언론인으로서는 최고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들인데 전반적 인식이 보수적이며 오만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만난 젊은 기자들은 꽤 개혁적이고 심지어 조중동 기자 중에도 말이 통하고 의기투합할 때도 있었던 반면,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보수성은 언론계 상층의 공통 특징이었다.
그 무렵 네덜란드 카린 판 헤닙 통상장관이 기업가 47명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주한 네덜란드대사관에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네덜란드 모델 소동을 보고했던 모양이다. 면담을 요청하기에 쾌히 승낙했다. 헤닙 장관 방한은 신문에도 등장했다. 그런데 장관과 인터뷰 기사에서 ‘네덜란드에는 경영참여가 없다’, ‘경영참여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는 기사가 나는 게 아닌가. 믿기 어려웠다. 7월12일(토) 10시 헤닙 장관과 경제국장, 암스테르담 상공회의소장, 주한 네덜란드대사가 내 사무실에 왔다. 34살 젊은 여성인 헤닙 장관에게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노동자 경영참여에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느냐고 물어보니,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언론을 어떡해야 하나.
일행 중한스 즈바르츠 암스테르담 상공회의소장은 머리가 반백인 노신사였는데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기업에는 활발한 경영참여가 있고 긍정적 효과가 있다. 최근 네덜란드 경제가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은 세계적 불황 영향이 크고, 임금인상은 자만심의 발로다. 위기가 오면 다시 단합할 것이다.” 경제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에 투자한 미국 기업들이 처음에는 미국에 없는 직장평의회(works councils)를 우려하지만 직접 경험해본 뒤에는 매우 만족해서 다른 미국 기업가들에게 좋다고 선전하더라.”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노동자가 경영참여하면 회사 망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재계 인사들에게 꼭 좀 이야기해주라고 부탁했다. 도와주고 싶은데 내일 귀국해야 하니 나중에 누군가를 보내 설명하도록 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 이들은 두달 뒤 네덜란드의 대표 기업가를 한국에 보내 재계 인사들 앞에서 강연했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7월14일(월) 새벽 4시 복통으로 깨어나 아침을 굶었다. 9시 수석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인구에 회자하던 ‘소득 2만달러 시대’와 관련해 양적, 경제적 개념보다 사회구조, 의식, 관행을 바꾸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성 홍보수석이 ‘소득증가운동’으로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에 1960년대 일본 이케다 정부 국정목표가 ‘소득배증’이었다고 소개해줬다. 이어서 헬기로 과천으로 이동해 제1회 대통령 경제·민생 점검회의에 참석했다. 부총리가 하반기 경제운용 계획을 설명했고, 노 대통령은 “‘법과 원칙’과 공권력 투입은 다른 것이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세균 의원이 “네덜란드 모델이 새 정부의 노동정책인 것 같은데, 아마 여야정 합의 모델인 모양이다”고 하기에 내가 네덜란드 모델을 설명하고 한국에는 시기상조지만 양보정신과 타협하는 자세는 배울만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100년 전 미국의 노사관계가 아주 험악했을 때 재계가 애호했던 구호가 바로 ‘법과 원칙’이었다고 소개해줬다. 7월15일(화) 대통령에게 네덜란드 통상장관과 상공회의소장 면담 내용, 네덜란드에 투자한 미국 기업의 태도 변화를 보고했다.
7월16일(수) 아침 7시30분,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한상의 조찬간담회에 갔더니 외국대사 몇몇을 포함해 340명이나 참석해 대성황이었다. 나는 세가지를 말했다. 첫째,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면서 전 정부 때 경기 살린다며 무리했던 부동산 경기 부양, 카드 남발을 비판했다. 둘째, 소득 2만달러 시대를 위해서는 사회보장 확충이 필요하다. 사회보장지출의 대 국민소득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1만달러 시대에 평균 16%였는데, 우리는 아직 10%에 못미친다. 셋째, 노사문제에서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웨덴의 사회적 대화 모델에서 교훈을 얻자, 외국인 불러 놓고 한국은 수준이 안돼 네덜란드 모델 적용은 무리라고 주장하는 언론을 두고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야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는 맹자 말을 인용했다.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의 기업별 노조는 투쟁과 협력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 정신분열증적 현상이므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함께 간 재경부 최광해 과장은 혹시 언론이 산별노조 지지로 해석할까봐 걱정하는데, 나는 할 말은 해야 한다며 별로 개의치 않았다.
7월18일(금) 오후 데니스 코모 캐나다 대사가 찾아왔다. 수도 이전 가능성을 타진하러 온 듯했다. 1994년 대사관 신축을 위해 사둔 땅에 건물을 신축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다. 코모 대사도 네덜란드 모델 소동을 알고 있었다. 그는 캐나다 대기업들은 노조 추천 이사를 1명씩 두는데 효과가 좋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각국은 여러 형태의 노동자 경영참여를 하고 있으며 대체로 긍정적 효과가 있다. 그런데도 한국 재계는 유독 경영참여를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당시 경총, 전경련뿐 아니라 양대 노총도 네덜란드 모델에 반대했다. 참여와 타협이 사는 길인데도 노사는 죽는 길인 줄 알고 극구 반대한다. 노사 쌍방의 반대를 극복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는 것, 이것은 아직 풀지 못한 우리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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