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개정 권고에도 방치 법안 42건 … 국회가 만든 ‘무법천지’ [정쟁에 멈춘 입법시계]

조병욱 2023. 7. 3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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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위헌·헌법불합치 판정 늘었지만
국회 늑장처리 탓 법안 개정속도 더뎌
낙태죄·집시·국민투표법은 ‘시한 경과’
경비업법 등은 개정안 발의조차 안 돼
전문가 “法 실효되면 사회적 혼란 야기
개정 시한 못 지킨 국회 비판받아 마땅”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나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리는 법안이 늘고 있지만 국회의 늑장처리 탓에 법안 개정은 더디기만 하다. 이 때문에 낙태죄를 비롯해 집시법과 국민투표법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도 개정시한이 경과한 채 법 개정없이 방치되고 있다. 이렇게 ‘입법 공백’ 위기에 처한 법안만 42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31일 국회사무처 법제실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위헌·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아 개정대상에 오른 법률은 총 42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위헌이 22건, 헌법불합치가 20건이다. 특히 낙태죄 등 3건의 법안은 이미 법원에서 제시한 개정시한을 넘겼고, 8월1일부터는 선거 현수막과 인쇄물 등을 규제하는 공직선거법도 개정시한을 넘겨 무법 상태에 놓이게 된다. 상임위원회별로는 행안위가 18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법사위 12건, 복지위 5건, 국방위 2건 등 순이다.

특히 국회 행안위 소관의 법안 중 선거법, 정치자금법, 국가공무원법,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경비업법, 지방공무원법 등은 개정시한이 올해 7월과 내년 5월 등으로 남은 시한이 길지 않지만 입법 속도는 여전히 거북이걸음이다. 이들 법안은 대부분 상임위 소위에 회부됐거나 소위를 거쳐 상임위에 계류된 상태다.

대체 법안이 발의조차 되지 않은 위헌·헌법불합치 법률도 상당수다. 경비원의 비경비업무 수행금지 및 위반 시 허가를 취소하는 경비업법 7조5항에 관한 개정안은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약국 법인 개설을 금지한 약사법 20조1항,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47조2항, 사무장병원 개설 수사에 관한 국민건강보험법 47조의2제1항, 헌재의 위헌결정의 기속력에 반하는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 심판대상에서 제외하는 헌재법 68조1항 등도 관련 개정안이 발의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21대 국회의 남은 임기는 10개월에 불과하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올가을 국정감사와 예산 등을 하고 나면 내년 4월 총선 모드에 돌입하기 때문에 의원들의 법안 처리 속도는 더욱 늦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회가 이처럼 늑장 대응하는 동안 헌법부합치 판정과 위헌 결정을 받은 법률은 쌓여만 가고 있다. 지난 6월29일 헌재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공무원 결격사유 규정과 공무담임권 침해와 관련해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관련 조항에 대해 내년 5월31일 시한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또 같은 날 화환 설치 금지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 침해와 관련해 공직선거법 90조와 256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고 역시 내년 5월 말까지 법 개정을 당부했다.

국회가 모든 법안에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2020년 5월30일 임기를 시작한 21대 국회는 그동안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이 된 법률 28건에 대해 관련 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영상물에 수록된 19세 미만 성범죄 피해자 진술에 대해 신뢰관계인 등에 의한 진술 성립을 인정하는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30조6항을 개정했고, 가정폭력 피해자가 배우자 및 직계혈족을 지정해 증명서 발급금지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가족관계등록 등에 관한 법률 14조1항도 개정했다. 또 예비군훈련 소집통지서 전달 의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할 수 있던 조항을 과태료 처벌로 전환하는 예비군법도 개정하는 등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다만 선거 현수막과 인쇄물 등을 규정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이날로 법 개정시한이 만료되면서 8월부터는 무법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헌법불합치의 경우 당장 기존 법이 무효가 될 경우 사회적 혼란 등을 고려해 헌재가 법개정의 시간을 준 것이기 때문에 이 시한을 넘기는 것이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통화에서 “법을 잘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정시한을 넘겨 법이 실효가 되면 무법상태에 놓이게 된다”며 “이를 방치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법원에서 충분히 시한을 주고 우리 국민의 생활이나 사회 질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법을 개정하도록 했지만 국회가 이를 지키기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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