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정의 더다이브 <23> | 올드미디어의 스트리밍 전쟁] 자르고 또 자르고…워너브러더스식 해법 휩쓴다
지난해 4월 CNN 직원들은 새 경영진의 결정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2년간 3억달러(약 3800억원) 이상 투입하며 준비해 온 유료 뉴스 스트리밍 서비스 ‘CNN+’를 출시 한 달 만에 중단한 것이다.
CNN은 프로듀서, 엔지니어, 마케터를 대거 고용하고 스콧 갤러웨이 뉴욕대 교수, 앨리스 로만 푸드 크리에이터 등 참신한 진행자를 영입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재슬러브(David Zaslav)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Warner Bros. Discovery) 신임 최고경영자(CEO)는 산하 케이블 방송사인 CNN의 프로젝트에 급제동을 걸었다. WBD는 2022년 4월 워너미디어와 디스커버리의 합병으로 탄생한 초거대 미디어 회사. CNN+ 셧다운은 서막에 불과했다. 오직 비용 절감에만 초점을 맞춘 재슬러브의 행보는 1년 넘게 진행 중이다. WBD 이사회는 그에게 두둑한 보너스까지 약속했다. 그뿐인가. 또 다른 ‘콘텐츠 왕국’ 월트디즈니컴퍼니도 재슬러브의 길을 걷고 있다.
자르고 또 자르고…확실히 돈 될 곳 투자
재슬러브에게 좌고우면은 없었다. 제작 예산을 삭감하고 인력을 줄였다. WBD의 스트리밍 서비스 ‘HBO맥스’의 오리지널 제작진이 직격탄을 맞았다. 약 9000만달러(약 1100억원)를 투자한 영화 ‘배트걸’은 막바지에 제작이 중단됐다. HBO맥스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도 취소됐다. 디스커버리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이유였다. HBO맥스의 최고콘텐츠책임자(CCO) 등 직원 70여 명도 회사를 나가게 됐다. 미 에미상 54개 부문 노미네이션(후보)에 빛나는 드라마 ‘웨스트 월드(West World)’의 차기작(시즌 5) 제작도 불투명해졌다. 현 경영진은 최소 예산이 1000억원에 달하는 드라마 제작을 승인하지 않았다.
재슬러브는 한발 더 나아갔다. 자체 스트리밍 보유 작품 수(라이브러리 규모)도 줄였다. 라이브러리를 유지하는 데는 저작권료와 클라우드 사용료 등이 만만치 않게 나간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스핀오프인 ‘더 낫 투 레이트 쇼 위드 엘모(The Not-Too-Late Show with Elmo)’와 청소년 드라마 ‘제너레이션’이 HBO맥스 구비 목록에서 사라졌다. 놀랍게도 ‘웨스트 월드’를 HBO맥스가 아니라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 로쿠 채널과 투비에서 틀고 있다. HBO맥스의 경쟁력이 떨어지더라도 수익부터 챙기겠다는 계산이다.
대신 재슬러브는 인기작을 활용한 라이선스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아마존의 스트리밍 서비스 ‘프라임 비디오’에서 단독 공개한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가 대표적인 라이선스 사업이다. 아마존이 WBD로부터 라이선스를 구입해 첫 시즌에 쏟아부은 제작비만 4억6500만달러(약 5900억원)에 달한다. WBD는 지난 4월 ‘해리포터’의 TV 시리즈 제작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WBD가 제작 중단 등을 통해 상각처리(write-down)한 콘텐츠 규모만 35억달러(약 4조4000억원). 콘텐츠를 부실 자산 대하듯 처리하고 제작비도 크게 삭감한 것이다. 재슬러브를 향한 할리우드의 원성도 커지고 있다.
WBD, 올들어 넷플릭스 제외하고 유일한 흑자 기록
월가의 분위기는 할리우드와 사뭇 다르다. 골드만삭스는 올 초 미디어 부문 ‘톱픽(Top Pick)’으로 WBD를 꼽았다. 5월 7일(이하 현지시각)엔 WBD 목표 주가를 21달러(약 2만6600원)로 올려 잡았다(7월 18일 현재 WBD 주가는 12달러(약 1만5200원) 선).
극단적인 비용 절감 덕에 WBD 스트리밍 사업 부문이 올 1분기 깜짝 흑자 전환(5000만달러·약 630억원)에 성공했다. 넷플릭스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흑자를 낸 스트리밍 사업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가입자도 160만 명 더 늘었다.
WBD 이사회는 합병을 주도한 디스커버리 측이 주축이다. 이사회의 시그널은 확실하다. 막대한 인수 비용을 치른 상태라 회사에 여윳돈이 없다. 비용을 감축하면 경영진한테 추가 인센티브까지 챙겨주겠다는 것이다. 미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면, 잉여 현금 흐름이 좋아지고 자기자본 대비 부채 비율이 줄면 WBD 경영진에게 돌아가는 성과보상주식(PRSU)이 최대 두 배까지 늘어난다.
디즈니와 CJ까지 영향
WBD의 수익 최우선 전략은 디즈니와 CJ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해 11월 디즈니에 복귀한 밥 아이거 CEO는 직원 7000여 명을 해고했다. 또 지난 5월부터 디즈니+에 있는 콘텐츠를 대거 삭제하고 있다. ‘윌로우’ ‘빅 샷’ ‘돌페이스’ 등이 디즈니+ 목록에서 지워졌다. 시장 분석 업체 모펫네이던슨의 마이클 네이던슨 애널리스트는 “콘텐츠 유지가 스트리밍 손익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WBD가 처음으로 인식했고, 디즈니도 콘텐츠를 줄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올 4월 WBD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맥스(Max)’ 하나로 통합했다. 다큐멘터리 위주의 디스커버리+도 맥스에서 구독할 수 있다. 최종 서비스 이름에 ‘미드(미국 드라마)’를 상징하는 HBO도 빼버린 게 눈에 띈다. 디즈니도 자체 보유한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와 ‘훌루’를 통합한 앱을 하반기 출시할 예정이다. 파라마운트도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파라마운트+·쇼타임)를 통합했다.
실적 경고등이 켜진 CJ ENM도 지난해 10월 삼성증권 애널리스트 출신의 구조조정 전문가로 사령탑을 바꿨다. CJ ENM 영업이익은 2019년 2693억원에서 지난해 1373억원으로 반 토막 났다. 올 1분기에는 503억원 영업손실까지 내며 적자 전환했다. CJ ENM이 인수한 미국 스튜디오 피프티시즌과 스트리밍 자회사 티빙이 1분기에 각각 400억원씩 적자를 냈다.
스트리밍 승자 분명해졌지만
올해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는 창사 100주년을 맞았다. 막강한 콘텐츠 파워를 자랑하는 두 기업의 몸을 낮추는 태세 전환은 스트리밍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지난해 4분기 기준으로 넷플릭스만 흑자(5억5000만달러·약 7000억원)를 냈다<표 참조>.
클레이턴 크리스텐센 교수의 ‘파괴적 혁신’ 이론대로 넷플릭스는 저가 제품으로 초과 만족을 만들어 내 콘텐츠 사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스트리밍으로 돈을 벌 수 없다.
전선을 넓게 보면, 넷플릭스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구글이 유튜브와 유튜브TV로 진격하고 아마존이 프라임 비디오로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최근 시가총액 3조달러(약 3807조원)를 돌파한 애플은 기회가 되면 디즈니를 인수할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넷플릭스도 올드미디어가 너도나도 스트리밍 시장에 뛰어든 3년 전쟁에서 겨우 승리했을 뿐이다.
Plus Point
복잡한 社名이 보여주는 미디어 빅뱅의 역사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가 보유한 콘텐츠 자산을 보면 남부럽지 않다. 메가 히트작만 꼽아도 ‘슈퍼맨’ ‘배트맨’ ‘원더 우먼’ ‘왕좌의 게임’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세서미 스트리트’ ‘루니 툰’ ‘프렌즈’ ‘섹스앤더시티’ ‘밴드오브브라더스’ 등이 있다. 지난 30년간 수차례 인수합병을 거듭한 결과다.
복잡한 사명(社名)에는 미국 미디어 빅뱅의 역사가 녹아있다. 간략히 설명하면, 1990년 시사 잡지로 유명한 ‘타임’과 5대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 중 하나인 워너커뮤니케이션스가 합병, 타임워너가 탄생했다. 이 회사는 1996년 CNN, 카툰네트워크 등을 보유한 케이블 회사 터너브로드캐스팅 시스템까지 인수한다. 2018년엔 통신 회사 AT&T가 타임워너(워너미디어)를 인수한다. 미디어 경영은 쉽지 않았고 AT&T는 3년 만에 워너미디어를 분사시켜 버린다. 분사한 워너미디어와 디스커버리가 합병한 것이 현재 WBD다. 결국 WBD는 ‘5대 할리우드 제작사(워너브러더스)+미국 양대 만화 회사(DC 코믹스)+독보적 유료 케이블 방송사(HBO·디스커버리·CNN·디스커버리 등)’가 합쳐진 회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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