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73> 18세기 후반 음악사의 변화] 시대의 변화 속 음악이 주는 위로와 행복
출장 일정으로 독일 함부르크로 가는 길이다. 인천공항에서 직항편이 없어 프랑스 파리에서 환승하는 일정이다. 14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우선 파리 공항에 먼저 도착했다. 비행 중에는 도통 잠을 못 자는 타입이라 움츠러든 몸을 겨우 일으켜서 공항 터미널로 걸어 나오는 길에 양손에 집어 든 가방과 캐리어가 집에서 출발할 때와는 달리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이윽고 새파란 하늘이 반짝이듯 들여다보이는 터미널 유리 지붕 밑에 자리한 환승 터미널에 도착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 사이로 자리를 잡고 앉아 함부르크행 비행편을 기다린다. 힘들다고 불평하지만 그래도 이 현대 문명이 주는 편리함에 감사해야 한다. 100여 년 전에 아마 이곳에 오고 싶었다면 배로, 기차로 또는 마차로 수개월을 이동해야 하는 거리를 불과 13시간 만에 이동했으니 말이다. 또 필자의 은사님께서 가끔 들려주시던 여의도공항에서 출발해 알래스카를 거쳐 파리로 오던 냉전 시대에 비하면 그야말로 바로 옆 동네 온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윽고 보딩이 시작되고 함부르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간만에 듣는 독일어가 반갑기만 하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손에 들고 있던 책은 슬슬 지겹기 시작하던 찰나에 필자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한 중년 아저씨 손에 들려 있는 신문에 눈동자가 의도치 않게 힐끔힐끔 움직인다. 보아하니 독일 주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종합 신문(Frankfurter Allgemeine)’인데 경제면 헤드라인을 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크게 적혀있다. ‘Die Zeit steht im Wandel’ 우리말로 ‘시간은 변화 중이다’ 또는 ‘시대는 변화 중이다’라는 뜻이다. 그리 낯설지 않은 문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매체를 통해 시대가 변화한다는 말을 수년째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로 더욱 자주 보는 표현이다. 농경시대, 산업 시대, 정보화 시대를 거쳐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혹자는 4차를 넘어 5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다고도 말한다. 많은 매체에서 현재의 흐름을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시간이 지나 후세에서 (이왕이면) 보기에 멋있는 단어로 현재 시대를 정의해 주길 희망해 본다. 헤드라인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찰나에 승무원이 간식을 가져다준다. 시대를 정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우선 먹고 현재를 사는 것 아니겠는가 싶어 냉큼 받아들어 샌드위치 한입을 베어 문다.
음악사 시대로 작가 구분하는 관행
아무래도 필자는 클래식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지라, 서양 음악사에 관심이 많이 간다. 그간 시간이 흘러오면서 음악도 시대에 따라, 또 사조에 따라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주의 시대, 낭만주의 시대, 인상주의 시대 등의 단어로 정의돼 있다. 이러한 시대적 개념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은 각 시대적 배경을 갖고 탄생한 작품을 해석하고 연주하는 것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를 앞 시대와 구분 짓고 현재 시대를 정의하고 더 나아가 미래 시대를 예견하는 것에 현재 많은 매체 및 학자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과거를 비춰 볼 때 음악사가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른 시대로 넘어갈 때는 어떠했을까. 음악가들이 유엔 본부 같은 곳에 모여서 오늘까지 고전주의 시대라고 하고 내일부터는 낭만주의 시대라고 부르자고 정의했을까.
답은 물론 ‘아니오’다. 대체로 일정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음악사 학계에서 전 시대에 흐르는 예술 사조를 통찰해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 중에서 필자가 관심 있게 살펴보는 시기는 18세기 후반, 대략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 고향 독일 본을 떠나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현재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온 1782년쯤이다. 이 시기에 유럽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변혁을 겪고 있었다. 1760년쯤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인해 신기술의 발전으로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또 식민지 무역으로 인해 엄청난 부가 유럽 대륙으로 몰려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1789년 촉발될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고 실제로 이후 영웅처럼 등장한 나폴레옹과 함께 전 유럽에 혁명의 기운이 휩쓸게 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럽고 엄청난 변화에 당시를 살던 누군가는 현재의 새로운 변화를 찬양하고, 누군가는 전쟁에 지쳐 쉼을 원했고, 누군가는 새로 쌓은 부와 함께 더 나은 삶을 즐기기를 원했고, 누군가는 편안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예술은 인간의 삶이 투영된 거울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당시에도 이 모든 이를 위한 작품이 존재했다.
베토벤이 빈에 정주하며 고전주의 음악의 대가 하이든에게 가르침을 받고 고전 소나타 양식의 작품을 작곡하는 동안 영국에 피터 헬렌달(Pieter Hellendaal)이라는 바로크 작곡가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바로크 양식의 작품을 쓰고 있었다.
북독일 함부르크에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가 ‘감정 과다 양식’이라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 사이 과도기적 양식의 작품을 작곡하고 있었다. 또 저 멀리 아일랜드에는 존 필드(John Field)라는 ‘녹턴(야상곡)’이라는 장르로 유명한 낭만주의 작곡가가 태어났다. 베토벤 또한 활동하며 후기에는 낭만주의 성향의 곡을 작곡했다고 평가받는다.
“어떤 시대 음악인지는 중요치 않아”
이 시대를 살던 한 작곡가를 한 음악사의 시대적 개념에 비춰 단순하게 바라보기에는 당시의 시대적 삶이 너무도 다이내믹했다. 작곡가의 작품 또한 매우 다채롭기까지 하다. 필자는 한때 이런 개념에 강박관념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늘 이 작곡가는 어느 시대 사람이고 그렇기에 이건 이렇게 쳐야 한다고 규칙화하듯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필자에게 네덜란드에 계시는 은사님이 답답하셨는지 웃으시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젠장, 그냥 닥치고 느끼는 대로 치는 게 최고야!”라고 외치셨던 순간이 생각난다.
비행기는 국경을 넘어 더 북쪽으로 날아가 이윽고 함부르크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11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아직도 이곳 북쪽 하늘은 따뜻한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독일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 팝 음악이 경쾌하게 필자를 맞는다. “지금 내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고 내가 듣는 음악이 어떤 음악이라는 게 무엇이 중요할까. 이렇게 음악이 혼란한 삶 속에도 늘 위로와 행복을 주는데 말이지.”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