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감추거나, 드러내거나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어느 날 둘은 막상막하의 실력을 겨뤄 보기로 한다. 먼저, 제욱시스는 탐스러운 포도를 그렸는데, 날아가던 새가 이를 진짜로 착각해 쪼아 먹으려 했다. 승기를 잡은 그는 그림을 천으로 가린 채 나타난 파라시오스에게, 그것을 들추라 요구했다. 그때 파라시오스는 그 천이 자기 그림이라고 답했다. 제욱시스는 자신은 새를 속였지만, 경쟁자는 인간의 눈까지 속였으므로, 패배를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익숙하니, 승패를 가른 이유를 좀 더 생각해 보고 싶다. 이 이야기는, 가상과 실재 혹은 허구와 진실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의 목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화가는 비슷한 듯 다른 방향의 기술을 썼다. 제욱시스는 가상으로 실재를 가리는 데 능했다. 포도가 상징하는 가상은 거칠고 못난 실재 생명과 자연을 매끄럽게 가렸다. 그의 가짜 포도 때문에, 미욱한 새는 진짜 사랑해야 할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파라시오스의 천은 진짜를 드러내는 기술을 상징한다. 그가 만든 가상은 우리가 굳게 믿었던 것의 허위와 부재를 폭로하고, 숨겨진 것을 깨닫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없지만 있어 보이게 하는 것과, 있다고 생각한 그것이 거기 없음을 알리는 방향 차이다. 화가들은 서로의 능력이 추구하는 방향 차이를 알았고, 무엇이 더 중한지도 수긍했다. 이 대결은 누가 더 속이기 어려운 대상을 속였는가를 겨루지 않았다. 고대 화가들의 일화는 진실을 감추는 자의 솜씨와 영민함보다,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자의 용기가 지닌 위대함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사회의 민낯을 마주한다면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방향을 따라야 할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 뉴스를 보자. 헛포도를 쪼느라, 진짜 포도가 썩는 줄 몰랐던 사건들이 연일 보도된다. 그럴듯한 포도에 속은 채 지금 나는 얼마나 많은 헛것에 현혹되어 있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누굴 속이는 줄도 모르고 누군가의 눈을 가리고 있을는지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 가짜 포도의 문제는 제때 챙겨야 할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돌봄 받지 못한 진짜들은 병들고, 사라져 버린다. 복잡한 전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헛것에 속아 놓쳐버린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담장 너머, 잘 지내고 있는 젊은이들을 떠올리며 그림 같은 진짜가 있을 거라 믿었는데.
파라시오스라면 나를 벼락같이 일깨우는 다른 그림을 그려주었을까? 있어선 안 될 사건을 자꾸 겪다 보니, 어쩐지 이걸 해결할 자신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또다시 선택 기회가 주어졌다. 감추거나, 드러내거나. 감당해야 할 실재의 과잉과 혼란이 두려워, 진실을 감추는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뼈아픈 비극을 계기로, 속고 속이는 위조를 중단하고 진실을 끄집어낼 수도 있다. 젊은이들을 향한 희망은 실재여야 한다. 그러니 학교와 군대에 희망을 그리는 화가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학교와 부대에서, 우리 사회에서 또다시 감추는 기술이 드러내는 기술을 이긴다면, 그땐 희망을 건다는 말부터 제욱시스의 포도다.
[권보연 인터랙티브 스토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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