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묘한 밸런스 ‘다소의 아쉬움’[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기자 2023. 7. 3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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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구극(究極)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김무곤 교수 ‘종이책 읽기를 권함’ 중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나는 늘 자신의 쓸모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2011년 겨울.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 어떠한 용도도 없는 가장 순수한 읽기라니! ‘별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읽는 행위’ 위에는 시간이 나이테처럼 축적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쓴다. ‘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그 여섯 번째는 김보리 작가의 ‘혼자라는 가족’(다람)이다.

혼자라는 가족 표지


‘나도 혼자 살고 싶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아 입에서 군내가 나고 싶어. 밥 대신 하루의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는 알약 같은 게 있다면, 그걸 먹고 싶어. 빨래도 청소도 일주일에 한 번씩만 하고 싶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싶어. 여행 갈 때 몇 끼니 반찬 따위를 미리 만들어 놓고 가야 하는 그런 조건부 여행? 딱 질색이야. 돌아와서는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 말고 말끔히 청소해 놓고 나간 그대로의 집 상태를 원한다고.’

혼자 사는 친구가 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여기는 사람 사는 집 같다”라며 부러워한다. “사람 사는 집 같은 건 대체 어떤 분위기야? 쉴 틈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데 뭐가 좋냐?”라고 물으면 “너는 혼자 사는 내가 왜 부러운데?”라고 되묻는다. 그럼 나는 혼자 살고 싶은 간절함을 속사포로 쏘아 준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경험만 가진 나로서는 다양한 삶의 형태의 장단점을 다 알 수 없다. 어떤 것이 더 나은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할 뿐이다. 가 보지 못한 길을 내내 아쉬워하며 뒤돌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식당에 1인석 칸막이가 있는 긴 식탁이 상당히 낯설었다. ‘혼자서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을까?’ 하고 생각했다. 겨우 10여 년이 흘렀을 뿐인데, 이제 한국에서도 어디서든 혼자 밥 먹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혼밥’의 시대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 통계청에 의하면 이미 세 집 가운데 한 집이 1인 가구라고 한다. 과거에는 집단으로 모여 사는 것이 진화의 한 형태였다면, 미래의 어느 날에는 혼자 사는 인류의 모습을 만날지도 모른다.

김보리의 ‘혼자라는 가족’은 온전히 혼자 살아가기를 선택한 지극히 평범하고 사적인 비혼의 삶을 담담히 그려낸 에세이다.

‘집’이라고 하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몇 명의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느냐만 다를 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같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날까지 먹고사는 ‘거룩한 일’을 하고 있고, 별것 아닌 인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산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은 삶의 고비마다 마주치는 선택과 결과 그리고 책임마저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누구를 탓하지도, 누구를 핑계 삼지도 못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기대지 않는 인생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인간적인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 삶에 대한 반성도, 성찰도 일어났다. ‘왜 혼자 사냐’ 또는 ‘왜 결혼했냐’ 같은 뻔한 질문 대신 ‘당신은 어떤 거룩함을 가지고 매일을 살고 있는지’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등을 질문하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에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이 모질고 험한 세상 사느라 ‘수고하셨어요’라는 한마디 말을 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 ‘다소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작가는 나와 참 다르구나’ 했다. 일생을 복작복작 시끄럽게 살고 있는 나는 세상 떠날 때만이라도 혼자가 돼 좀 조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척점에서 들려주는 듯한 작가의 소망에 나는 지극히 공감했다. 이렇게 먼 공감도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공감한 지점은 ‘혼자’이거나 ‘죽음’과 같은 무거운 단어들이 적힌 곳이 아니었다. ‘다소 아쉬울 따름’이라는, 바로 이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정도’ 말이다. 열심히, 가치 있게, 잘 살았다면 그 생의 마무리에서 무슨 절절한 바람이 그리 많겠는가. 간절히 원하지만, 갖지 못해도 그저 ‘다소 아쉬울 따름’인 정도가 딱 좋을 것이다. 일생을 복작복작 시끄럽게 살아야 하는 나는 죽음의 순간 역시 복작복작 시끄러울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안다. 내가 사랑하지만, 몹시도 수다스러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말이다. 내 끝이 그리된다고 해서 내가 불행할까? 절대로 아니다.

‘혼자라는 가족’을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 사는 여자의 삶에 로망이 있고, 혼자 사는 김보리 작가가 부럽다. 아무리 부러워해도 혼자가 되지 못할 인생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진 않다. 그저 ‘다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니까 다소의 아쉬움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절묘한 밸런스다.

김윤정(서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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