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말년, 스스로를 향한 통렬한 채찍질···오에 겐자부로 마지막 소설 ‘만년양식집’

김종목 기자 2023. 7. 3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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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간 10년만에 번역
작가의 실체 녹인 분신같은 주인공
그의 여동생·아내·아들 통해
인생 부정당할만한 비판 쏟아내
삶·미래 세대에 대한 낙관은 견지
2012년 당시 오에 겐자부로. 위키미디어 공용

오에 겐자부로(1935~2023) <만년양식집>(문학동네)이 일본 출간(2013년) 10년 만에 번역돼 나왔다. 마지막 소설이자 오에의 분신 같은 조코 코기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섯 번째 소설이다.

소설 1장 ‘여진이 이어지다’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원전 사고 이후 100일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조코는 ‘3·11 이후’ 초기 짧지만 고통스러운 꿈에서 깨어나 종이에 다음 문장으로 시작하는 메모를 적는다.

“아카리를 어디에 숨겨야 하나 싶어 당혹스러워한다.” 마흔여덟 살 아카리를 등에 업은 일흔여섯 살 조코가 방사성물질에 차단돼 암반층 물도 오염되지 않았을 시코쿠 숲 ‘오시코메’ 동굴로 가려고 마음먹는 내용이다. 아카리는 오에의 장애인 아들 히카리를 모델로 한 소설 속 인물이다. 아카리는 여진을 두려워하면서도 “악의를 가진 자의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분노를 나타낸다.

조코는 원전 대사고 영상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지낸다. 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인의 울음소리”를 내고 만다. 조코와 비키니환초 수소폭탄 피폭자와의 대화를 기획한 NHK TV 취재팀 PD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나자 기획을 연기하고 사고 현장에 가 만든 프로다. PD는 피난 지시가 내려진 곳에서 불 밝힌 집을 발견한 뒤 집주인을 찾아가 “왜 남아 계신가요”라고 묻는다. “제가 키우는 말이 출산을 앞두고 있어 집을 떠날 수가 없답니다.” PD는 다음 날 저녁 다시 이곳을 찾는다. 집주인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막 태어난 새끼 말을 저 들판에서 뛰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방사능비로 오염되었으니까요.” 조코는 “(방사성물질로 오염된 땅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복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고는 정신적 ‘파국’에 빠져 ‘우우’ 소리를 내며 운 것이다.

오에는 <만년 양식집>에 핵무기와 원전에 대한 자신의 오랜 문제의식을 녹였다. 조코는 ‘요요기 공원’에서 열린 ‘십만인집회’ 중 강건한 어조로 연설을 진행한다.

“저는 모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그런 마음을 품고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 십수만 명은, 이대로 모욕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더 나빠져서 다음 원전 사고가 일어나면 이대로 모욕 속에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걸까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체제는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건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고 우리는 원전 체제라는 공포와 모욕의 바깥으로 나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터입니다.”

오에는 한국에서 ‘노벨평화상’ ‘반전 평화’ ‘장애인 아들’ 같은 말들로 주로 알려졌다. <만년양식집>에서 눈여겨볼 건 자기비판이다. 만년에 오만·아집·기만·과시에 빠진 한때 ‘양심적, 진보적 지식인’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오에는 2015년 방한했을 때 “인간 오에 겐자부로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으로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와 함께 <만년양식집>을 꼽았다. 그는 “<만년양식집>에는 노인이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소설을 어떻게 써왔는가’ 자문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이 자문 핵심이 비판과 비평, 성찰이다.

비판을 주로 담당하는 건 ‘세 여자’다. 소설 중심 화자는 노년의 작가인 ‘나(조코)’다. 14개 장 중 ‘세 여자가 쓴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장이 4개 나온다. 조코의 여동생 아사, 아내 치카시, 딸 마키가 조코와 과거와 현재, 발표작에 관해 쓴소리를 뱉어내다. 이들은 가족 일상을 비디오를 찍듯 생생하게 소설로 옮기는 일부터 부분적 오류가 드러난 작품 내용까지 조코와 그의 작품세계를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프라이버시 침해의 희생양”이 됐다고 여긴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빌려 표현되곤 하는 오에의 국가 비판은 남성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 비판”(옮긴이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인데, <만년양식집>에서 여성이 ‘자기중심의 코토’를 비판하는 것이다.

“아빠는 자신의 가정을 기반으로 해서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것까지 소설로 써왔지요. 오랫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가끔 그 방식 자체를 변명하고 싶어지는 것으로 보여요. 예컨대 소설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라는 식, 즉 소설이라는 형식에 책임을 지우는 식으로……”(마키).

“오빠의 그 시구절에는 거짓말이 담겨 있으니(이제 와서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모델이 된 가족들 입장에서 말하자면 오빠의 소설은 거짓말투성이다)… 죽은(살해당한?) 기 오빠를 이거 잘됐다는 둣 ‘그리운 시간의 섬’으로 보내버린 이후 오빠는 최소한 자기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진심을 담은 진실한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아사).

아카리도 3인칭으로 칭하며 “언제나 조코씨는 다른 말을 사용합니다. 제가 하는 말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말과 다른 말로 말합니다. 그건 완전히 문제입니다. 마키도 엄마도 그렇게 말합니다”라고 했다.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지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필립 로스는 그의 작중인물 중 한 사람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쓴다는 건 그 사람한테 사회적으로 지장을 주는 일입니다’.”

“오빠의 소설은 거짓말투성이”
“가족은 프라이버시 침해 희생양”
“제가 한 말과 다른 말로 말한다“
가족의 말 통해 격렬한 자기비판

소설 속 연설도 오에가 2012년 7월 16일 요요기 공원에서 직접 발표한 내용이다. 나카노 시게하루 <초봄의 바람>을 인용하면서 나온 착오도 비평한다.

비판에 대한 해명이나 반론이 없는 건 아니다. “작가는 아들이 지적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장애와 적극적으로 함께 살아갈 결심을 하는 동시에, 작가인 자신의 픽션의 총체를 지탱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v. 반복해 나타나며 중심 주제의 방향을 알려주는 단어나 이미지)를 선택한 것이니까요.…그러한 비판에 자주 사용된 표현인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같은 걸 넘어 아들의 장애는 작가가 받아들인 운명입니다,”

오에는 <만엔 원년의 풋볼> 등 자기 작품 제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대중에게도 알려진 실제 체험을 많이 반영했다.

“오십 년을 훌쩍 넘어선 오에의 작가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박유하)일 정도로 자기비판과 비평의 강도가 세다. 박유하는 해설에서 “오에는 자신의 작품이 ‘기도’로서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가 써온 글들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을 돌보는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낼 ‘힘’을 갈구하는 기도였다. 기도를 지탱하는 ‘힘’이란 자신과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을 때만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일 터. 지나치리만큼 엄격하게 보이는 코기토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은, 그 ‘힘’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 오에는 힘을 얻기 위해 자기파괴를 시도한다”고 했다.

소명선(제주대 교수)은 2018년 낸 논문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양식집’에서 혹독한 비판을 두고 “작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어 비판하고 규탄하는 메커니즘은 오에가 구축해 온 작품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에가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이토록 가혹하게 몰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에 대해서는 ‘그것이야말로 만년양식이기 때문’이라는 해답밖에는 제시할 수 없다”는 비평가 노자키 칸의 의견을 소개한다.

‘만년양식집(晩年様式集)’은 영어로 ‘In late style(만년의 양식으로 살면서)’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동명의 책 <On late style(말년의 양식에 관하여)>(한국에서 late를 주로 ‘말년’으로 번역했다)에서 따왔다. 두 사람은 1995년 잡지 ‘세계’ 기획으로 ‘생의 마지막을 응시하는 스타일-문학·사회·시대’라는 제목으로 대담을 나눴다. <만년양식집>에도 사이드와 <말년의 양식>에 관한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소명선은 소설을 두고 “‘3·11 후’라는 파국적인 상황 속에서 ‘3·11’ 전에 사망한 자들과 자신이 만들어낸 픽션 속의 가공의 인물의 죽음에 대해 특히 그들의 ‘만년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고, 그런 과정 속에 오에 자신도 파국의 상황을 살아가는 노작가로서 그들의 삶과 동일한 위치에서 관찰하는, 자기해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설에는 나뭇가지에 고인 물웅덩이에 머리를 박고 죽은 기의 죽음 이야기도 한 축으로 흐른다.

소명선은 “파국이 예상되는 사회적 위기 상황에 대해, 현재의 지배체제에 대해 반권력의 입장에서 ‘부정성’과 ‘화해불가능성’, 그리고 비타협적인 태도는 <만년양식집>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베토벤 후기 작품군 중 발견한 것이 ‘비화해성’, ‘부정성(否定性)’, ‘부동성(不動性)’을 특징으로 하는 ‘만년성’이다.

오에는 죽음과 파국에 관한 기조 속에서도 낙관을 잃지는 않는다. 그 낙관은 다음 세대에 걸쳐 있다. 다음 소설 속 부록에 실은 시 마지막 부분이다.

“…부정의 감정에 깊이를 더해간다면/ 불안정한 땅에서/ 높은 곳으로 내밀 손만은/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부정성의 확립이란/ 어중간한 희망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 어떤 절망에도/ 동조하지 않는 일이다……/ 여기에 있는 순수한 한 살 아이가/ 모든 것에서 새로이,/ 왕성하게/ 무언가를 찾는다./ 내 안에서/ 어머니의 언어가/ 처음으로 수수께끼가 아니게 된다./ 작은 아이들에게 노인은 답변하고 싶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 오에 겐자부로 별세···韓 군사독재·日 헌법개정 비판한 지식인
     https://www.khan.co.kr/world/japan/article/202303131516001


☞ “떠나는 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것이 삶의 순리다”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01041549001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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