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죽인 지적장애인’, 다른 장애인 부모들은 왜 그를 응원했나[판결돋보기]
“피고인은 존속살해죄를 인정하십니까?”
“네!”
지난 19일 수원지법에서 기묘한 재판이 열렸다. 아버지를 고의로 죽였냐는 판사의 질문에 피고인석에 앉은 남성은 그렇다고 해맑게 대답했다. 그러나 판사는 결국 남성의 살인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해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사건은 한 30대 지적장애인 남성이 새해 첫날부터 할머니에게 반찬 투정을 한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한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 댓글 창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수 있냐’며 남성을 비난하는 댓글이 가득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에는 숱한 사정이 있었다.
‘반찬 투정’ 해프닝? 알고보니 가정폭력 피해자
31년 전인 1991년 12월,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 사건의 피고인 안모씨다. 안씨의 어머니는 안씨를 낳은 뒤 집을 나가 연락을 끊었다. 친할머니가 안씨를 대신 키웠다. 안씨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일이 없는 날이나 일이 일찍 끝난 날이면 술을 자주 마셨다. 술에 취하면 모친과 아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일삼았다. 안씨가 특수고등학교에 다닐 때 안씨의 눈썹 옆을 등산용 막대기로 찔러 다치게 한 적도 있다.
사건 당일에도 안씨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모친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했다. 식사가 나오자 “X년”“개밥이냐”며 폭언을 퍼부었다. 안씨 할머니는 손자를 불렀다. 방에 있던 안씨는 “왜 술만 마시면 할머니를 못살게 구느냐”며 뛰쳐나와 아버지를 주먹과 발로 때렸다. 안씨의 아버지는 이웃의 119 신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곧 사망했다.
“‘살해’ 뜻도 모르는데 살인의 고의 인정할 수 있겠나”
재판에 넘겨진 안씨의 죄목은 ‘존속살해’였다. 수사기관은 안씨가 아버지를 죽일 의도로 때렸다고 봤다. 하지만 안씨의 변호인들은 안씨에겐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고의 여부’를 쟁점으로 한 이 재판은 배심원 9명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안씨 변호인은 우선 지적장애인인 안씨가 ‘사람을 살해한다’는 개념부터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국립법무병원 정신감정의에 따르면 안씨의 지능지수(IQ)는 48로, 4~8세 수준이다. 감정의는 안씨가 ‘사람을 죽인다’는 뜻을 파악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또 수사기관에서 신문받을 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냐’는 질문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대답했을 것이라고 했다.
재판에 전문심리위원으로 참여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의 판단도 같았다. 그는 의견서에서 안씨 지적 수준에서는 ‘내가 아빠를 이 정도 때리면 결과적으로 사망할 것’이라고 추론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15~16세는 돼야 이런 추론을 하는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재범 가능성 높지 않아”... 장애인 부모들도 선처 호소
검찰은 안씨의 재범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으나 변호인들은 반박했다. 가정폭력 가해자인 아버지가 할머니를 학대하자 폭발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검찰이 안씨의 재범 위험성을 평가하는 데 사용한 척도는 지적장애인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했다. 교육 수준이 고졸 이상이거나 안정적 직장생활을 하면 재범 위험성이 낮게 측정되는데, 안씨는 애초 다른 사람처럼 정상적인 학교생활도, 경쟁적인 구직활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변호인들은 감형 사유가 있는데도 안씨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주장도 했다. 피해자 유족인 안씨 할머니가 처벌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안씨가 징역을 살게 되면 사회 복귀가 영영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수감생활 동안 안씨가 해온 자립 훈련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클 뿐더러,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면 안씨는 평생 시설을 전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최악의 경우 정신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될 수 있다고 했다.
하루종일 이어진 국민참여재판에선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험악했던 댓글창과 달리 안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이들이 재판정을 가득 채웠다. 안씨와 같은 장애인 작업장에서 일하는 동료 장애인의 부모들이 안씨를 응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법정을 찾은 이들이 너무 많아 방청석이 부족할 정도였다.
이들은 판결에 앞서 재판부에 탄원서를 냈다. 탄원서에는 “법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실로 주어지는 고통을 가족끼리 감내하며 살아가다, 어느 날 우발적으로 일어난 난관을 그들 가족만의 방법으로 타결하려다 발생한 사건”이라며 “이제 와서 과정은 접어두고 결과만 갖고 판단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배심원 설득할 수 있는 ‘국참’이라 가능했던 판결”
안씨는 결국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9명 중 8명이 ‘존속살해’ 대신 ‘존속상해치사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봤다. 또 만장일치로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수원지법 형사14부(재판장 고권홍)는 배심원들의 평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안씨에게 아버지를 살해할 고의가 없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통상 존속살해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에서 상해치사죄를 적용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일은 흔치 않다.
안씨를 대리한 임한결 변호사(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국민참여재판’이라 가능한 판결이라고 했다. 정형화된 판례나 논리에 따라 판결이 이뤄지는 일반 재판과 달리, 국민참여재판에선 피고인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임 변호사는 “국민참여재판이 아니었다면 전문심리위원 의견서나 정신감정 요청 등이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라며 “아무리 공판중심주의가 주요하게 다뤄진다고 해도 일반 형사사건 재판에선 서면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기 쉬운데, 배심원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게 중요했던 사건이었다”고 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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