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사칙연산으로 보는 국가 R&D 투자 원칙
지난해 우리나라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조6733억달러로 세계 13위로 잠정 집계됐다. 2020년과 2021년 2년 연속 세계 10위였다가 지난해 13위로 떨어지면서 3년 연속 톱(Top) 10 유지에 실패한 것이다. 원·달러 환율이 상승한 탓도 있지만, 반도체 업황 부진에 따른 수출 감소와 에너지 수입 급증으로 역대 최대 연간 무역 적자를 기록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 경제 저성장 흐름이 쉽게 반전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전망하는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각각 1.4%와 1.5%다. 지난 2년간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지르는 등 이미 인구 절벽에 처한 상황에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돌파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떨어진 대한민국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을 통한 산업기술 혁신이 뒷받침돼야 한다. 최근 국가 R&D 투자 효율성 제고를 위한 내년도 예산 재배분이 진행 중인데 국가 R&D 투자 기본 원칙에 대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라는 사칙 연산을 이용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더하기(+)로는 초격차 기술 확보를 위한 과제 대형화와 도전적인 연구에 대한 투자다. 파편화된 사업을 연계해 중대형 과제 위주로 통합하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은 지금 글로벌 기술 패권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초격차 기술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후발 주자와 기술 격차를 압도적으로 늘리거나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기술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미래를 좌우할 만한 핵심 기술, 핵심 산업에 전략적 장기 투자가 이뤄지도록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 국가 전체적으로 장기 큰 목표를 설정해 유능한 산학연을 서로 연결하고 도전적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한다면 초격차 기술 확보에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빼기(-)로는 적극적인 민관 협업 추진이다. 민간 주도 역할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정부가 나서 끌어가지 말고 민간을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다.
기술 스타트업을 위한 민관 합동 펀드 제공, R&D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와 규제 개선, 기업이 원하는 인재 공급 등은 사실상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민간 기술혁신을 위해 공공 조달 시장의 막강한 구매력을 활용하는 것도 정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줄곧 실패를 거듭하던 스타트업 '스페이스X'에 조달 계약을 보장해 상업용 우주 화물 운송 서비스를 꽃피웠다.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우주발사체 누리호도 국내 중소기업 300여곳의 기술력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이처럼 정부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공공 구매를 보장해주는 것은 기업의 안정적 연구개발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앞서 나가려면 정부와 민간이 원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정부는 기술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모두 지원할 수 없으므로, 민간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사업화를 도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 연구개발 인프라를 확충하는 역할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
셋째, 곱하기(×)로는 R&D의 글로벌화다. 동맹국간 긴밀한 R&D 협력으로 생산성 극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기술 선진국과 적극적 기술협력과 국제 공동연구는 한정된 예산 내에서 외부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2009년부터 세계 최대 국제 기술협력 프로그램인 유레카(EUREKA)FH 국내 산학연이 해외 산학연과 공동 연구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개방형 국제협력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약 10년간 국제 기술협력을 진행해본 결과, 우리나라의 기술 경쟁력이 예전과 비교해 상당히 높게 평가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수많은 해외 기업과 대학, 연구소들이 우리나라 기업을 우수한 수준의 카운터파트너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술력, 자금, 인력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나라와 교류, 협력하겠다는 나라가 늘고 있다. 앞으로도 해외 유수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재외 한인 공학자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간 기술협력 프로그램을 확대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세계적 수준 글로벌 공동 연구를 진행하려면 상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꾸준하고 지속적인 관계 향상 노력이 진행돼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관심을 두고 지원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넷째, 나누기(÷)로는 '위험 분산'이라는 정부가 해야 할 R&D 투자 본연의 역할이다.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당장은 기대되는 효과가 불분명해 민간이 투자하기를 주저하는 분야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예컨대 디지털 전환(DX)이나 탄소중립 관련 연구개발 분야가 이에 해당한다. 인공지능(AI) 같은 디지털 기술,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친환경 기술은 산업 대전환 시대에 많은 기업이 관심을 갖는 분야다.
하지만 막대한 투자 비용에 비해 이익은 언제 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지금의 성과가 중요한 중소기업이 투자를 감행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분야에 정부가 전략적인 투자를 집중해 마중물 역할을 한다면 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 정부가 지출하는 R&D 금액은 30조7000억원으로 전체 정부 예산(634조원)의 약 5% 정도다. 적지 않은 예산이지만 한정된 자원이므로 필요한 분야에 적절하게 사용되는지, 투입 대비 생산성이나 가성비가 어떠한지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산 사용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R&D 예산 금액 전체 규모를 줄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개발 속도가 중요한 기술 경쟁 시대에서 오늘 연구개발을 포기하는 것은 곧 내일 삶의 질을 희생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기술이 국가 경제뿐만 아니라 안보와 직결되는 시대에, 국가 산업기술 정책의 수립과 운용, 그리고 이에 따른 적절한 투자는 이전보다 한층 더 중요해졌다. 정부는 초격차 기술 확보(+), 민간과의 원팀 플레이(-), R&D의 글로벌화(×), 위험 분산(÷)이라는 국가 R&D 투자의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대원칙 아래 국가 예산의 선택과 집중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길 기대한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
〈필자〉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이후 기관장으로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민 원장은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 동안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지난해 9월부터 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민간 주도 성장 전략을 뒷받침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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