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가 돼야겠다”는 결심, 분단 아픔 속 피어난 꿈[플랫]
“분단의 고통은 할아버지가 참전하셨던 6·25전쟁에서 끝나지 않고 북한이탈주민에게도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새로운 이산가족 청년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는 것은 너무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션디자이너 권봄씨(29)는 정전협정 후에도 고향으로 오지 못하고 북한에서 세상을 떠난 국군포로의 손녀다.
지난 2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권씨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MZ세대였지만, 또래 친구들에 비해 통일이나 분단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고 확고했다. 70년이란 시간이 흘러 세대가 바뀌고 정전·분단 관련 인식이 흐릿해지고 있지만 권씨가 이렇게 단단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그의 가족사 때문이다.
충북 제천에서 태어난 권씨의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20세 때 국군 8사단에 입대했다. 1952년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고 1953년 금화지구 전투에서 싸우다 그해 6월 인민군에 포로로 잡혔다. 정전되기 불과 한 달 전이다.
“할아버지 얼굴을 뵌 적이 없어요. 할아버지는 국군포로라는 신분 때문에 북한 북부에 있는 탄광에서 일하시다 40대 후반에 탄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가족들도 사고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고, 일하다 돌아가셨다는 말만 전해들었다고 해요.”
권씨의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결혼해 5남매를 두었다. 권씨는 “할아버지가 북한에 혈육이 없으니 가족을 많이 만들고 싶으셨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북한 계급 ‘성분’에서 최하위 계층에 속하는 국군포로에 대한 차별은 2세까지 이어졌다. 권씨 아버지는 국군포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군대에 가지 못했다. 군대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당에 입당하고 취업과 승진을 하는 북한에서는 사실상 사회생활의 단절을 의미했다.
양 할아버지, 저희도 통일 생각 많이 해요
‘국군포로 후손’ 탈북민 권봄씨
국군포로였던 나의 할아버지
그 탓에 하고 싶은 것 못한 아빠
손녀인 내게도 차별 이어지자
‘더 이상 살 수 없다’ 탈북 결심
“분단 뒤 고통받은 내 가족사가
통일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국군포로 2세라는 차별에 방황하던 권씨 아버지는 1994년 권씨를 낳았다. 사업 수완이 좋은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졌는데, 다행히 사업이 잘돼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있던 DVD 기계 덕분에 권씨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 콘텐츠를 접했다. 6세 때 한국 만화 <옛날 옛적에>의 ‘배추도사 무도사’를 봤고, 9세 때 본 <겨울연가>를 계기로 한국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빠졌다.
“<겨울연가>의 내용보다는 배우들이 예쁘고 잘생겨서 좋았어요. 같은 말을 쓰는데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곳이 나오니 신기했죠. 어릴 때부터 한국 드라마에 빠져서 자라다 보니 친구들과 말투가 달랐어요. 친구들은 ‘습니다’로 끝나는 ‘다나까’ 말투였는데 저는 ‘그랬어요’ ‘저랬어요’라고 하니까 친구들이 신기하게 봤어요.”
권씨는 13세에 지급받은 교복이 몸에 맞지 않자 직접 제작해 맞춰 입었고, 매직기를 사서 긴 생머리를 고수할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에서는 ‘항일유격대 소년단 사상을 따라가야 한다’면서 선생님들이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자르겠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저는 학교에 안 다니겠다며 가방을 들고 집에 가곤 했어요. 왜 소년단 사상을 따라야 하는 건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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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권씨에게 북한의 통제와 규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차별도 많이 받았다. 건설현장에서 노동하는 ‘돌격대’에 3일간 강제로 보내지기도 했는데 부모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사흘간 속을 태웠다.
“패션에 관심 많고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돌격대로 가서 강제 노동하는 순간, 여기서 못 살겠다는 반항심이 나왔어요. 또 진짜 못 살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 것은 규율 위반으로 잡힌 날인데, 한 명씩 ‘너희 아버지 뭐 하시니’ 물어보더니 노동당 간부라고 하면 그냥 가라는 거예요. 제 차례가 와서 ‘저희 아버지 아무것도 안 하시는데요’라고 하니까 ‘그럼 넌 청소해’라고 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아버지가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니 미래가 없구나, 정말 못 살겠구나 싶었죠. 국군포로 가족이라고 무작정 차별받는 자체도 싫었고요.”
권씨는 2011년 고등학교 졸업 후 탈북해 중국 옌지 친척 집에 머물다 태국 등 동남아를 거쳐 2012년 9월 한국에 입국했다. 북한에서 이미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기숙 대안학교에 입학해 4년 가까이 입시 준비를 한 끝에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 전 조기 취업해 현재는 중견 의류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꿈을 한국에서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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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적응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해답을 찾아나갔다. “대학교 3학년 때 ‘난 한국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방인인가’라는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학교 친구들은 제가 북한이탈주민인지 전혀 몰랐지만 정체성 혼란이 생겼어요. 당시 교양과목으로 역사 수업을 듣게 됐는데 거기(북한)에서 배웠던 내용과 똑같았고, 역사 속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였잖아요. 제 정체성은 남과 북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장점을 살려서 이방인이라는 고립된 생각에서 벗어나 남북 문화에 기여하는 패션디자이너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죠.”
개인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는 권씨는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일상복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권씨는 한국에 온 뒤 할아버지를 더 그리워하게 됐다고 한다. “18세에 한국으로 와서 혼자 생활하면서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20세에 입대해 정전 한 달 전에 포로가 된 후 낯선 곳에서 고향을 무척 그리워하시다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할아버지 상황과 제 상황이 완전히 같아요. 저도 통일이 돼야 부모님을 만날 수 있어요. 이산가족 신청도 할 수 없고, 통일이 돼서 엄마 아빠를 만난다고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젊은 시절이 아닌 나이 든 모습의 부모님을 본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무너질 것 같아요.”
분단이 없었다면, 국군포로 가족이 아니었다면 권씨의 가족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 집은 화목하고 웃음이 많은 집안이라 만약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면 제가 굉장히 철이 없었을 거예요. 역사의 아픔을 통해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교훈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제 또래 친구들은 통일이 되는 건 좋지만 경제가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반대하기도 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더 열심히 일해 한국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국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북쪽에도 열심히 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인권 탄압 속에서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사는 과거의 저 같은 친구들이 많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권씨는 혼자서는 통일을 절대 이룰 수 없겠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통일을 한 번 더 생각해보자’는 기류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훌륭한 디자이너로 성장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도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은경 기자 yama@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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