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성지’ 다부동과 게티즈버그[이용식의 시론]
1950년 8월 대구에 인민군 포탄
시산혈하 속에서 방어선 사수
미군 주력 투입과 반격 전환점
6·25와 미 남북전쟁에 공통점
경북 칠곡은 호국과 자유 聖地
미래세대 교육장 역할도 중요
많은 사람이 여름 휴가길에 오른 지난 29일 토요일 오전,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도 살을 태울 듯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틀 전에 이승만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국내외 관심 속에 열렸음을 믿기 힘들 만큼 인적조차 드물었다. 해설사는 물론 그 흔한 그늘막도 없었다. 그래서 단출한 전시관보다 크게 잘 지어진 사무동이 더 민망해 보였다.
1950년 다부동 사투는 바로 이맘때 벌어졌다. 김일성은 광복절 기념식을 대구에서 하겠다며 8월 공세를 밀어붙였다. 낙동강 방어선이 여기저기서 무너졌다. 8월 4일 왜관철교를 폭파했지만, 인민군은 강을 건너 동명·가산 공략에 나섰다. 8월 18일 인민군 박격포탄이 대구 도심에 떨어지자 임시수도는 당일 부산으로 옮겨갔다. 미군은 유사시 한국에서 철수하기 위한 데이비드슨 라인(마산∼밀양∼울산)을 설정했다.
다부동은 대구를 지킬 남북전선(왜관∼창녕∼마산)과 동서전선(왜관∼영천∼포항)의 꼭짓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부근에서 8월 한 달 동안 시산혈하(屍山血河) 격전이 펼쳐졌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에 사수 임무가 주어졌다. 8월 21일 11연대가 고지를 빼앗기고 후퇴했다. 백선엽이 그들 앞에 나섰다.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망국이다.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운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1948년 8월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됐지만, 2개월 뒤 유엔에서 ‘유일 합법정부’ 승인 문제가 한창 논의 중일 때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나 국가 요건인 ‘내적 평정’까지 의심받게 됐다. 인근 지역(나주) 제헌 의원 이항발은 “정부는 껍질뿐”이라고 개탄했지만, 국가 자체가 껍데기뿐이었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 거의 없었다. 나라를 지킬 군대도 동맹도 없었다. 국군조직법과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 직후에 부랴부랴 만들어졌다. 미국의 안보 측면에서 한국은 검토 대상 16개국 중 15위였다(1947년 5월 12일 국무부·육군·해군 조정위원회 비망록). 1949년 6월 미군 철수도, 1950년 1월의 애치슨 라인도 그 연장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면 남침을 당했다. 미군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김일성은 정반대 입장이었다. 절체절명의 충돌 지점이 다부동이었다. 따라서 미국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 전투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승패의 분수령이 됐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군은 일거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총력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자유 수호 전투였다. 북군은 “영토나 전리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역사상 첫 전쟁”(영화 ‘게티즈버그’)이라고 했다. 게티즈버그 국립 군사공원의 모토 역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불멸의 연설은 전투 종료 4개월 뒤 묘지 봉헌식에서 나왔다. 미국 입장에서 6·25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주변 미국인들에게 ‘미국 정신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을 물었는데, 여러 사람이 게티즈버그를 추천했다. 누구라도 그곳이 자유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당장 사이버 방문도 가능하다(www.nps.gov/gett). 다부동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6·25 당시 인민군이 오기도 전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환영한 지역이 수두룩한데, 칠곡군은 끝까지 맞섰으며, 지금도 매년 전승 축전을 열고 참전용사 시가행진도 벌이는 호국과 자유의 성지다. 이런 위대한 의미에 비해 전적기념관은 너무 초라하다. 성지순례 대상은 고사하고 웬만한 민간 박물관보다 못하다.
호국 영웅들이 후대의 극진한 대접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세대는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도 찾아와 스스로 배우는 교육장 역할까지 할 수 있게 전적관을 잘 꾸미고 운영해야 한다. 백선엽 장군 파묘를 주장하는 세력이 설치고,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라는 식의 반역적 역사관이 판치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국내외 곳곳에서 피서와 휴식을 즐기면서도, 다부동의 피어린 전투가 있었기에 북한 주민과 다른 삶을 누리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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