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과학칼럼] 국가 R&D 질적 성장 위한 연구행정 선진화
최근 대덕특구에서는 연구행정 콘퍼런스가 개최됐다. 정부 출연연구기관, 대학, 지자체, 기업 등 총 70여개 기관 200여명의 연구자와 행정가가 한자리에 모여 우리나라가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연구뿐만 아니라 연구행정도 선진화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매우 시의적절하고 공감되는 바이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수한 연구자를 많이 육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연구자들이 R&D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연구 몰입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상당히 중요하다.
기술경쟁력이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세계 주요국들은 경쟁적으로 과학기술 분야 정부예산을 확대하고 있으나 이에 비례해 정부 규제도 증가하고 있다. 미국에서 1991년부터 2018년 동안 신규 도입된 R&D 관련규제만 110개이고, 기존 규정의 개정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많다는 보고가 있다. 그만큼 연구자들의 행정 부담이 커지고 있다. 미국 연방 실증파트너십국의 연구책임자들은 전체 연구시간 중 44%를 연구행정에 할애하며, 주당 평균 54.3시간 근무시간 중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15시간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행정 생태계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는 연구시간 중 연구행정업무에 투입하는 비중이 선진국과 비교해 훨씬 높다. 지난해 일본 문부과학성이 주요국 연구인력 1인당 연구지원인력 수를 비교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0.22명으로 경쟁국인 독일 0.63명, 영국 0.53명, 프랑스 0.48명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구자의 R&D 외 행정업무 소요 비중은 62.7%로 미국 연구자의 50.2%보다 높으며, 연구 관련 행정 부담이 전체 인건비의 약 35%를 차지한다.
미국, 유럽연합(EU)과 같은 선진국들은 연구자나 행정인력과 별도로 연구기획, 연구과제 관리, 성과 활용 촉진 등 연구실에서의 연구활동을 근접 지원하는 연구행정 생태계가 잘 발달해 있다. 미국은 1940년대 연방정부의 연구비 증가로 인한 규제가 많아지면서 연구행정을 확대 배치하기 시작했고, 1950년대 후반에 이미 전문 연구행정협회들이 설립되면서 전문직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재도 협회를 통해 연구행정 간 네트워킹, 온·오프라인 교육, 인증제도 등이 운용되고 있다. EU도 1980년대 초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연구행정 배치가 이뤄졌고, 1990년대 들어 EU 차원과 개별 국가 차원에서 전문 연구행정협회를 설립하고 네트워킹, 교육훈련, 인증제를 운용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정부 차원에서 2010년대 초부터 연구행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지원한 결과 연구행정 체계를 도입한 기관이 2012년 58개에서 2020년 182개로 크게 확대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행정업무를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직 교수, 연구원, 변리사, 변호사, 박사후연구원 등 전문인력이 다양한 분야와 업무에서 활동한다는 점이다. 최근 R&D의 복잡도가 높아지면서 연구자만으로는 연구과제를 기획하고 수행해 질적 성장을 이뤄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정부 연구비의 효율적 관리라는 관점에서 행정인력은 최소 규모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연구행정이 연구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고도화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도 연구행정은 기관이 책임지고 연구자는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선진국형 연구지원 체계로 빠르게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연구행정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그 역할과 위상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연구행정은 단순 행정지원에서부터 기존 행정인력이 담당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영역까지 그 업무와 수준이 매우 폭넓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높은 전문성과 역량을 필요로 하는 연구행정 인력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처우와 경력 경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연구자들이 실제 어떠한 연구행정업무에 많은 연구시간을 빼앗기고 있는지 실태를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 효율적인 현장맞춤형 연구행정 체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연구행정 인재를 육성하고 그 역량을 높이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수준별로 마련되고 제공돼야 한다.
이렇게 선진 연구행정 체계를 구축하면 연구자들은 연구에 더 집중해 우수한 성과를 만들어내기 쉬울 것이고, 연구과제 관리도 연구자 개인 차원이 아닌 조직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으며, 이공계 전공자들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경전서후(耕前鋤後)’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남편은 앞에서 밭을 갈고 아내는 뒤에서 김을 맨다는 뜻으로, 부부가 서로 극진하게 도우며 일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연구개발과 연구행정도 이처럼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과학기술 발전을 이끄는 두 수레바퀴와 같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경쟁력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연구개발능력뿐 아니라 연구행정의 경쟁력도 함께 높아져야 할 것이다.
김장성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
nbgk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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