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의 강간죄’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누구? [뉴스AS]

오세진 2023. 7. 31. 0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 반대 3대 주장 허점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관 앞에서 형법 297조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21대 국회에는 ‘물리적인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하도록 한 형법 조문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또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여’ 이뤄진 성관계를 처벌하도록 변경하는 등의 형법 개정안 3건이 발의돼 있다. 현실에선 폭행과 협박을 동반하지 않은 강간 사건이 더욱 많은데, 현행 법으로는 이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그런데도 형법 개정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최근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2023년도 시행계획’을 확정하면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비동의 강간죄’ 신설안 등 형법 제297조 개정 검토안을 세부 과제에서 뺐다.

정부 등 일각에서 제기되는 비동의 강간죄 신설에 대한 대표적 반대 논리는 크게 세가지다.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될 경우,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돌아갈 것’이고, ‘동의’란 개념이 불분명해, ‘성폭력 무고’가 많아져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이유 등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대 논리를 들어봤다.

① 입증 책임을 피고인에 전가?…재판 현실과 맞지 않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2월8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성관계 당시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다는 입증 책임이 검사가 아니라 (강간) 피고인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본다”며 ‘비동의 강간죄’ 도입 반대 뜻을 밝혔다. 법원행정처도 같은 입장이다.

‘검사에게 있는 범죄사실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법조계 일각에서 제기하는 대표적인 반대 논리다. 하지만 실제 재판 과정을 고려했을 때 그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의견이 같은 법조계 안에서 나오고 있다.

현직 판사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피고인에게 증명 책임이 전가된다는 주장에 대해 “말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및 여성시민사회단체 243곳이 지난 2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에서 개최한 ‘형법 297조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 나와 “입증 책임은 당연히 검사에게 있으며, (현재도) 검사는 (강간 피의자를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가 (성관계 당시) ‘동의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며 이렇게 말했다.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돼도 성관계 당시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검사의 입증 책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유죄 사안(강간죄로 기소된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에서 ‘동의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기소되는 사건 대부분에서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어 “입증 책임 개념은 피고인에게 (자신이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주관적인 증명 책임은 (피고인과 피해자) 양 당사자 모두에게 부과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유·무죄는 피고인과 피해자 중 누구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는 물론이고, 검사가 피고인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외에도 피고인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제출하는 증거자료와 증인신문 내용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결정된다는 취지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관 앞에서 형법 297조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② ‘동의’ 개념 불분명?…대법원, 판례로 이미 기준 제시

‘동의’라는 것이 불분명한 개념이라서, 명확성을 요구하는 형법상의 범죄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동의는 이미 기존 법률에 자리잡은 개념이다. 서혜진 변호사(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는 “한 예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상대방 ‘의사에 반하여’ 촬영하는 행위를 범죄(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로 규정하고 있다”며 “동의 개념은 결코 형법적으로 모호하거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대법원은 2019년 6월 “(피고인이 피해자를 상대로 한 행위에 대해) 피해자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그 행위의 경위, 피해자의 연령, 범행 당시 정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 행위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아 구체적·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2019도3341)한 바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소속 이경환 변호사는 “현행 성폭력 법제는 이미 동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요소들을 보유하고 있다”며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한 강간죄 도입은 성폭력 법제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변화가 아니라, 일부 처벌 공백이 있던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③ 성폭력 무고 증가?…근거 없는 두려움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되면 일명 ‘성폭력 무고’가 많아져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을 것이라는 주장도 대표적 반대 논리 중 하나다. 하지만 막연한 우려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10월 발간한 ‘디지털 성폭력 범죄, 성폭력 무고죄를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2017∼2018년 검찰이 수사한 성폭력 범죄 피의자는 8만677명이다. 같은 기간, 무고 사건 전체 피의자 1만3534명 가운데 성폭력 관련 무고로 형사입건된 피의자 수는 1190명(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제3자가 무고 피의자가 된 사건과 중복된 사건은 제외)이다. 이 가운데 실제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341명에 그쳤다. “성폭력 사건 중 무고 사건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이 당시 연구진의 설명이다.

서혜진 변호사는 “무고의 대상이 되는 범죄는 사기, 절도 등 다양하다. 그런데 유독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만 무고가 늘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며 “무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그 어떤 논의도 진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