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아저씨가 대만주식 추천했다고?... 신종 사기에 피해액 60억
피해자가 플랫폼에 돈 넣자 사이트 닫고 잠적
재접근해 “출금해주겠다”며 추가금 요구
“저희 ‘외인 전용 통로’는 세계 최고의 외자 기관 투자가들이 사용하는 시스템입니다. 투자자들은 순조롭게 자금을 인출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 전용 플랫폼을 통해 대만 상장 주식에 투자하자며 투자자를 꾀어내 해당 플랫폼에 돈을 넣게 한 후, 인출을 막아 이들의 금전을 빼돌린 신종 사기가 번지고 있다.
대개 주식 거래는 증권사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 갑자기 자금 인출이 막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기범이 투자자를 속이기 위해 자체 플랫폼을 개설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은 “외국인 전용 플랫폼은 처음 들어봤다”며 “통상적인 투자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민국(가명·52)씨가 8000만원을 잃게 된 시발점은 카카오톡 한 통이었다. 본인을 ‘염승환 이베스트투자증권 이사’라고 주장한 인물은 이씨에게 “투자 수업에 들어와 인기 주식(에 대한 정보를) 받고 싶지 않냐”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염 이사는 유튜브에서 ‘주식 일타강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또 무료의 투자 수업을 해주겠다며 텔레그램을 다운로드받을 것을 권유했다. 국내에 본사가 있는 카카오톡이 아닌 해외에 소재한 텔레그램은 사기범들에겐 상대적으로 범행을 하기 유리한 채널이다. 우리 금융당국이 협조를 요청하기 쉽지 않은 이유에서다.
약 150명이 있는 단체 텔레그램 방에서 그의 무료 강의는 두 달간 계속됐다. 거래량과 가격의 상관관계, 주식 선정의 4대 요소 등 주식을 하는 투자자라면 알만한 정보들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씨는 단 1원도 요구받지 않았다. 방 운영자(염 이사 사칭 인물)는 국내 상장 종목인 A사에 투자해 10% 이상의 수익을 낸 그래프를 게시물로 올렸다. 그는 “회원 수를 늘려 다음엔 B사에 투자하자”고 했고, 방 회원들은 그의 말에 동조했다.
이번엔 이씨도 운영자의 지시에 맞춰 B사에 투자했지만 오히려 7%의 손해를 봤다. 운영자는 “한국 시장은 우릴 세력으로 인식해 국내에선 (이런 투자기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며 “(해외 투자를) 외국인 통로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지목한 시장은 대만이었다. 이씨는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방에 바람잡이가 많았던 것 같다”며 “나 하나를 속이기 위한 방이었다”고 했다.
◇ 투자 유리한 플랫폼이라더니… 예치금 꿀꺽 후 사이트 닫았다
대만 주식 사기엔 등장인물이 추가된다. 환전상이다. 방 운영자는 이씨에 환전상 김수철(가명)씨를 소개하면서 “재벌 친구와 제가 계속 환전하는 환전상이고 손실이 있으면 선생님께 배상해 드리겠다”고 했다. 환전상은 우리나라 원화를 스테이블코인 테더로 바꾸는 역할이었다. 이씨가 환전상에게 돈을 입금하면 환전상 김씨는 이씨의 전자지갑으로 테더를 송금했다.
방 운영자는 이씨에게 외인 통로 플랫폼 C를 다운받는 링크를 보냈다. 그러면서 운영자는 “(외인 전용 통로는) 예치된 모든 자금은 단지 감독만 받는 것이 아니다”라며 “위탁 은행은 반드시 이 자금에 대한 보험을 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씨를 안심시킨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전용 투자 플랫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운영자는 이씨에게 C 플랫폼에서 매수·매도할 종목, 매수·매도 가격, 타이밍, 비중 등을 상세히 지시했다. 이씨는 세 차례에 걸쳐 환전상에게 8000만원을 보냈다. C 플랫폼에선 여느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과 마찬가지로 거래 내역과 수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씨의 C 플랫폼 계좌는 대부분 빨간 불이었다.
하지만 C에 있는 주식을 현금화할 수 없었다. 이씨가 텔레그램을 통해 C 플랫폼 관계자에게 문의하자 이 관계자는 소득세를 명목으로 10%를 따로 입금해야 예치된 자산을 뺄 수 있다고 했다. 방 운영자와 환전상과의 연락이 끊긴 데다 추가금까지 요구받자 이씨는 그제야 염 이사 사칭 사기인 것을 알았다. 이후 C 플랫폼 접속조차 막혀버렸다.
‘실제’ 염승환 이사는 본인 사칭 사기행위가 많다고 읍소하고 있다. 염 이사는 조선비즈에 “카카오톡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 등 여러 소셜네트워크(SNS)에서 사칭하는 사람이 많다”며 “리딩방 운영은 물론 외부 고객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상담한 적이 없다”고 했다. 염 이사는 사칭과 관련해 경찰서에 조사를 요청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형사소송법상 염 이사는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에 따른 고소권자는 범죄로 인한 피해자인데, 수사기관은 이같은 사건의 피해를 금전에 한정하고 있다. 즉 사칭범에 속아 투자했다가 돈을 잃은 피해자만이 사칭범을 신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경찰 관계자는 “주식 전문가를 사칭해 투자자들의 돈을 편취한 게 범죄 사실이라면 사칭을 당한 이가 아니라 돈을 잃은 사람이 범죄 피해자”라며 “피해자만 고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똑같은 구조에 48명이 60억원 잃었다
이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본인과 같은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 32명을 모았다. 사기범들은 염 이사 외에도 ‘배터리 아저씨’로 개인 투자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박순혁 전 금양 홍보이사,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장 등을 사칭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사칭범인 걸 모른 채 당했다.
이씨는 비슷한 구조의 사기 피해자들과 환전상의 계좌를 취합하던 중 다른 사건임에도 환전상 계좌가 일부 겹치는 것을 확인했다. C 플랫폼의 환전상 계좌 10개 중 3개가 또 다른 사건인 D 가상자산거래소의 환전상 계좌와 일치했다. D 거래소 사건에서 대만 주식은 비상장코인 ESB로, C 플랫폼은 D 거래소로 바뀌었을 뿐 구조가 동일했다.
박 전 이사, 존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오건영 신한은행 WM본부 팀장을 사칭한 이가 투자자에게 접근해 비상장코인인 ESB 투자를 권유했다. 사기범들은 ESB는 D 거래소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코인이라며, ESB를 사기 위해선 본인이 추천한 환전상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D 거래소도 C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환전상을 낀 구조인 것이다. 출금 과정에서 10~15%의 수수료를 요구하는 것과 현재 출금이 막힌 것까지 C 플랫폼 사건과 같다.
동일인이 구성 요소를 변경해 같은 구조로 연속해 사기를 치는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D 거래소 사건의 피해자는 현재까지 19명이다. 두 사건의 중복 피해자 3명을 제외한 두 사건 피해자는 48명으로 피해자 추산 피해 금액은 총 60억1000만원이다.
◇ 끝나지 않은 사기…투자자 2번 울린다
사기범은 피해자들의 돈이 플랫폼과 거래소에 묶여 있다는 점을 악용해 출금을 해주겠다며 2차 사기 목적으로 또다시 접근하고 있다. 이씨는 “C 플랫폼의 상급 회사라는 업체가 텔레그램을 보내 계좌에 있는 돈을 돌려준다고 했다”며 “성공할 경우 10%의 커미션을 달라고 또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경찰은 사건에 연루된 환전상 1명의 신원을 확보했다. 피해자들은 특정된 환전상 등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수사를 통해 또 다른 환전상과 주범 등이 추가로 확보되면 이들에 대해서도 법적 대응을 할 계획이다. 금감원은 “불특정 다수에게 고수익 정보를 준다고 홍보하는 업체는 불법 업체이므로 어떤 금융 거래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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