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한국인의 ‘한’ 대변해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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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호우로 인명과 농작물 피해가 막심한 판에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이 생겨 나라가 어수선하다.
슬픔과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는 노래 '울고 싶어라'로 아픔을 나눠볼까 한다.
이때 창법 저속, 퇴폐 등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송 정지를 당한 가수들도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수해와 각종 문제를 함께 극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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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호우로 인명과 농작물 피해가 막심한 판에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이 생겨 나라가 어수선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는 노래 ‘울고 싶어라’로 아픔을 나눠볼까 한다. 밴드 사랑과 평화는 이남이·최이철 등이 결성한 밴드로, 가수 이장희가 주선해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멤버 가운데 이남이는 이전부터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사랑과 평화에서도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못했다. 게다가 록밴드들이 자주 그랬듯 멤버들과 불화도 있었다. 그는 음악활동이 어려워지자 1980년쯤 경기 용인에 칩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음악을 하지 못해 참담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고 자신의 심경을 담은 노래 ‘울고 싶어라’를 만들었다.
노래는 1981년 ‘나비소녀’를 불러 신예로 떠오른 가수 김세화에게 전해져 녹음됐지만 레코드사는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해 음반을 발표하지 않았다. 결국 이 곡은 사장되고 말았다.
이후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는 1988년 88올림픽이라는 세계적 행사를 치르게 됐다. 당시 정부는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이전에 없던 다양한 조처를 했다. 이때 창법 저속, 퇴폐 등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송 정지를 당한 가수들도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남이도 그중 하나였다. 결국 1988년 사랑과 평화의 ‘울고 싶어라’가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때만 해도 가수는 외모를 잘 가꿔 방송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한마디로 방송용 의상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남이는 반대로 누더기 의상에 벙거지를 쓰고 방송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이는 콘셉트라기보다는 음악을 하지 못한 자신의 한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이남이의 이례적인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마치 한국전쟁을 겪고 고도성장과 억압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의 한을 대변하는 듯했으리라.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은 가고 친구도 가고 모두 다/ 왜 가야만 하니 왜 가야만 하니 왜 가니/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떠나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떠나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이상하게도 삶 속에서 곤란한 일은 연달아 오곤 한다. 그럴 때면 맹자가 고자와 나눈 대화인 ‘고자장(告子章)’을 떠올리게 된다. 하늘은 한 인물에게 큰일을 맡기기 전에 뼈를 깎는 굶주림과 고통을 줘 인내심을 기르게 한다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수해와 각종 문제를 함께 극복했으면 한다.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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