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대피소 된 대중목욕탕...쪽방촌 주민들, 더위 피하러 간다
지난 29일 오후 9시 서울 중구에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해는 졌지만 야외 기온이 27도, 습도는 70%에 달해 한증막 같았다. 같은 시각 서울역 근처 한 목욕탕에선 인근 쪽방촌 주민3명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이곳은 서울시가 7~8월 한시적으로 쪽방촌 주민들이 열대야를 피할 수 있도록 지정한 ‘밤더위 대피소’다. 올해 처음 도입했다. 매일 쪽방촌 복지 시설에서 나눠주는 무료 이용권을 내면 목욕도 하고 시원한 수면실에서 잠도 청할 수 있다. 1인당 한 달에 10장쯤 나눠준다.
이날 밤 목욕탕에서 만난 쪽방촌 주민들은 냉탕에 몸을 담근 채 “오랜만이다” “무더위에 잘 지내고 있느냐” 등 서로 안부를 물었다. 인근 청파동 고시원에서 4년째 혼자 지내고 있다는 50대 남성은 “오늘이 10번째 방문”이라며 “좁고 찜통 같은 고시원 방의 무더위를 싹 잊을 수 있다”고 했다. 후암동 쪽방촌에 사는 배모(60)씨는 “작년 여름에는 에어컨 틀어주는 무더위 쉼터를 이용했는데, 올해는 아예 탕이 있는 목욕탕을 쓸 수 있으니 더 좋다”고 했다.
하지만 ‘밤더위 대피소’가 아직은 쪽방촌 주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이날 목욕탕이 야간 영업을 시작한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이용한 쪽방촌 주민은 8명에 불과했다. 일반 손님은 6명이었다. 목욕탕은 서울시로부터 쪽방촌 주민 1명당 야간 목욕비 1만5000원을 받는다. 일반 손님 요금은 2만원이다. 목욕탕이 이날 밤 벌어들인 수입은 24만원이다. 500여 평 규모의 시설을 밤새 운영하는 목욕탕 업주는 적자를 볼 수밖에 없다.
목욕탕 사장 정모(79)씨는 “코로나 이후 손님이 크게 줄어 야간 영업을 못 했는데, 서울시에서 ‘서울역 근처에 야간 대피소를 맡을 다른 목욕탕이 없다’고 부탁해서 이달부터 24시간 영업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무더위에 고생하는 쪽방촌 주민을 돕는다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새로 고용한 야간 아르바이트생 2명 인건비와 에어컨 전기료, 보일러 요금 등 관리비를 다 합치면 평소 한 달 운영비보다 1000만원은 더 들 것 같아 걱정이 많다”고 했다. 목욕비를 받지만 추가되는 인건비와 운영비를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목욕탕 직원 장모(58)씨는 “원래 오전 6시쯤 출근했는데, 야간에 손님을 받은 탕을 청소하려면 매일 새벽 2시 반에 나와야 한다”며 “(정부와 서울시가 책임져야 할) 주민 복지를 민간 목욕탕에 떠넘기는 것 아니냐”고 했다.
서울 시내 쪽방촌의 밤더위 대피소는 총 3곳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역 앞 목욕탕을 이용한 인근 쪽방촌 주민은 총 230명으로 하루 8.8명에 그쳤다. 영등포와 종로 인근 쪽방촌 주민들이 이용하는 목욕탕 2곳의 이용객은 각각 104명(하루 4명), 78명(3명)으로 집계됐다. 서울 시내 쪽방촌 전체 주민이 2400명 중 3곳 이용객이 하루 15~16명에 불과한 셈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선의로 동참한 목욕탕이 손해 보지 않도록 쪽방촌 주민 손님이 오지 않더라도 서울역 인근 목욕탕은 최소한 800명분, 영등포와 종로 목욕탕은 각각 최소 400~600명분 목욕비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역 근처 목욕탕의 경우 최소 1200만원을 보장받는 셈이다. 이 관계자는 “현장 점검에 나서 더 많은 쪽방촌 주민이 밤더위 대피소를 이용할 수 있도록 알리겠다”고 했다.
민간 목욕탕이나 사우나 등을 폭염이나 혹한 대피소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앞서 몇몇 지자체에서도 추진했다. 서울 강북구가 2018년 관내 찜질방과 협약을 맺어 한파 등에 어르신과 이재민이 대피할 수 있는 ‘365 안전 쉼터’를 지정했다. 대구시도 2019년 찜질방을 폭염 대피소로 활용하는 시범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이후 코로나 사태로 거리 두기 방역 지침을 강화하면서 활성화하지 못했다. 한 시민은 “폭염이 갈수록 기승을 부릴 것인데 쪽방촌 주민들을 위해 에어컨이 나오는 야간 목욕탕을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은 것 같다”며 “더 많은 분이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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