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혐오의 정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공격…네타냐후 입지 확장에 악용
혐오 부추기는 정치 멈춰야
지난달 27일 프랑스 파리 외곽 낭테르에서 교통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알제리계 10대 소년이 경찰 총격에 숨진 사건은 올해 초 연금개혁으로 홍역을 치른 프랑스를 또 한 번 격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성난 군중의 폭력시위가 이달 초까지 이어지면서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체포되고 방화·약탈로 이어졌다. 2005년 파리 교외에서 아프리카 출신 두 10대 소년이 경찰을 피해 변전소 담을 넘다가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이민자 폭동 이후 가장 심각한 폭력 시위로 기록됐다는 점에서 프랑스는 또 한 번의 생채기를 안게 됐다.
무엇보다 인종차별을 금기시하는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폭력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기록된다.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인종 종교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철저히 금하는 나라다. 1894년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가 독일에 군사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유대계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체포해 식민지 기아나의 ‘악마섬’ 감옥에 유폐했다. ‘반역죄를 저지른 유대인’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드레퓌스를 향한 대중 혐오는 더욱 극에 달했는데, 문제는 진범(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명백한 증거에도 반유대 정서를 타고 진범이 무죄를 선고받자 이에 격분한 대문호 에밀 졸라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의 ‘로로르’ 신문 기고문을 통해 부당함에 항의한다. 1898년 세계를 뜨겁게 달군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군국주의자·왕정복고주의자·반유대주의자·자본가·가톨릭 교회 등 보수 세력 대 지식인·공화주의자·노조로 양분돼 처절하게 대립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인종 종교에 대한 혐오가 사회를 얼마나 괴물로 만드는지 고통스러운 교훈을 줬다. 프랑스는 1958년 제정된 헌법 제1조 1항에 ‘출신, 인종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보장한다’고 아예 못 박아 버렸다.
‘인종차별 없는 나라’라고 헌법에 명시까지 했지만 이번 알제리계 소년 피격 사건 등에서 프랑스는 ‘내재된 차별의 사회’라는 민낯을 드러냈다. 이민자 수가 급증하면서 배태된 필연의 사회문제일 수 있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위험한 건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극우세력과 이에 편승한 정치다. “차별이 없는 나라라고만 하지 말고 솔직히 인정하고 차별·편견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한편에선 극우 성향의 평론가가 가해 경찰관의 가족을 돕고 싶다며 시작한 후원에 160만 유로(약 22억 원)가 넘는 돈이 모여 또 다른 논란이 됐다. 피해 소년 유족을 위한 모금액 42만 유로(6억 원)보다 4배가량 많은 액수였다.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 소속 의원은 “이민 정책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한 발 더 나아가 혐오를 정치화하며 갈라치기를 통한 세 불리기에 나섰다.
이스라엘에서는 정치가 혐오를 앞세워 훨씬 더 위험한 선택을 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3~5일 ‘테러세력’을 소탕한다며 요르단강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상대로 20여 년 만에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여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2000년 시작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인 ‘제2 인티파다’ 이후 최악의 전투로 평가된다.
유엔 등 국제사회마저 비난하는 이번 작전의 배경에는 초강경 우파 성향 집권 연정을 이끄는 네타냐후 총리의 정치적 계산이 있다. 총리직에서 쫓겨났다가 극우파와 손 잡고 작년 11월 총선에서 승리해 복귀한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혐오를 부패 혐의로 기소돼 재판 중인 본인의 방탄에 적극 이용한다. 올해 3월 ‘네타냐후 방탄법’이라 불리는 총리 직무 부적합성 결정 관련 기본법 개정에 이어,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대법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해 ‘사법부 무력화’ 비난을 받는 ‘사법정비’ 입법을 밀어붙이다 국민 저항에 부딪히자 이번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로 향하는 화살을 외부의 더 확실한 혐오 대상으로 돌린 것이다. 이 틈을 타 여당은 지난 24일 사법정비 입법을 끝내 강행해 나라를 대혼란에 빠뜨렸다.
어느 곳이건 혐오를 먹고 크는 극단의 세력이 있지만, 사회가 건강하려면 이들이 큰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관용과 토론·타협을 통해 자정 기능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사회에 이 같은 ‘구심력’이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는 오히려 혐오의 등에 올라 타 사회를 극단으로 내모는 것을 즐기며, 그 과정에서 일부의 야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다. 극우 유튜버 논란이 있는 이들이 고관대작 자리를 꿰차고, 학부모 악성 민원에 절망한 교사의 극단적 선택을 두고 ‘종북주사파’ 운운한 대통령실 관계자의 한 언론 인터뷰 등을 미뤄볼 때 요즘 우리나라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선정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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