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유머와 폭력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다. 언어를 매개로 대화할 때도 사회구성원들 간에 통용되는 일종의 규칙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 규칙을 어길 때 이미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언어학자 그라이스가 말한 대화의 격률이 그러한 규칙에 해당한다. 양의 격률이란 대화가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짓이라 믿는 것, 증거가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질의 격률도 있다. 관련성의 격률은 논의 주제에 알맞은 것을 말하라는 것이고, 태도의 격률은 모호하거나 중의적인 표현을 피하고 명료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러한 격률을 지키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기는 화법은 유머코드로 작용한다. 아재개그는 대부분 중의적인 표현으로 듣는 이의 예측을 배반함으로써 웃음을 주려 한다. 예를 들어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사과를 말하는 맥락에서 먹는 사과를 언급한다면,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니 질의 격률을 어기지는 않았으되 논의 주제와 다른 엉뚱한 것을 말했으니 관련성의 격률을, 모호함을 불러들였으니 태도의 격률을 어기는 것이다. “역술인 아무개가 왔었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답한 것이 실은 “풍수학과(?) 겸임교수인 다른 아무개가 왔다”는 뜻이라 우긴다면 이 또한 일종의 격률 위반이다. 격률 위반이 지나치게 반복될 때 더 이상 웃음을 줄 수 없다. 너무 적은 정보만을 제공하는 바람에 정작 논의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말하지 않거나 자신만이 생각하는 함축적 의미를 따로 숨겨두는 것은 때로는 유머코드가 되지만 때로는 선전선동의 코드가 되기도 한다. 정치가의 언어나 광고의 언어, 코미디의 언어에 본질적으로 비슷한 측면이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2016년 가을부터 수많은 사람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던 촛불집회는 그 다음해 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라는 절차를 통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실 이것은 다소 엉뚱한 결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이 그토록 오래, 나름 체계적으로 지속되었음에도 그 성패 여부가 열 명도 안 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결정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 맘대로 헌법을 고치고 파괴하던 과거의 독재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점에서 헌법재판소는 이른바 1987년 체제의 중요한 성과이며 시대적 의의를 지녔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법조계 엘리트 내부에서조차 이를테면 대법관에 비해 “학식과 덕망”을 딱히 더 갖춘 것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판결(저 유명한 관습헌법, 요컨대 “서울은 우리 마음속의 수도이다”라는 식의 행정수도 위헌판결을 생각해 보라!)에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좌우되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오는 요인 중의 하나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2017년 당시에도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간단히 말해 시민사회의 숙의를 통해 해결되어야 할 정치적 사안들이 “법대로 하자”는 간편한 논리에 내맡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 사태는 갖가지 우연과 제 나름의 동학을 가지고 움직여 어느새 “사법의 정치화” 단계로 이행하였다. 사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법대로 하는 것” 그 자체가 매우 강력한 정치적 행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적어도 정치세계에 관한 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세상이 “법 그 자체가 주먹이 되는” 세상으로 변화한 셈이다. 요즈음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드라마들 속에 등장하는 검사나 변호사들이 십중팔구 법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이나 조직의 이익을 추구하는 ‘찌질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사회는 드디어 사법의 정치화도 넘어 정치적 언어가 유머코드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듯하다. 통제되지 않는 강한 권력 앞에서 약자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명문화된 법률 체계가 필요하다. 논리와 격률을 지켜 정확하게 규정되는 법적 체계 속에서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해내고 감추어진 함축에 기초하여 억울하게 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보호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라 권력을 쥔 강자가 그러한 화법을 구사할 때 그것은 그 자체로는 유머가 된다. 그러나 그 유머가 다름 아닌 본의를 숨긴 함축을 통한 공격과 결합될 때 이내 공포로 변한다. 교실 뒤편에 졸개들을 거느리고 앉은 일진이 맥락에 맞지 않는 유머를 구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유머가 아니라 폭력이다. 1987년 체제가 가져온 정치의 사법화는 그렇게 민주주의의 손상으로 연결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셈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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