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19세기까지 神의 영역이던 일기예보는 어떻게 과학이 되었나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2023. 7. 3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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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에 떨던 英 해군, 함정에 과학자 함께 태워
비글호 선장 피츠로이, 찰스 다윈과 항해하며 기압·날씨 관계 연구
예언 아니라며 새 단어 ‘forecast’… 확률적 예측으로 재난 피해 줄여
일러스트=이철원

이번 달 계속된 폭우로 날씨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태풍이나 물난리는 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피해가 급증하면서 기상 예보는 더욱 중요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19세기까지 기상 예보는 미신으로 여겨졌다. 날씨는 신의 영역이었고, 기껏 달무리나 동물에게 의존하는 것이 전부였다. 1854년 영국 의회에서는 일기예보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과학자들은 날씨 예측이 점성술이라며 꺼렸다. 기상 예보가 과학이 된 것은 어느 선장 덕분이다.

19세기 해군력이 중요했던 영국은 전 세계로 군함을 파견해 해도를 작성해 나갔다. 지도 없이 떠나는 이 작업은 매우 위험했고 선원들은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1828년에는 해군 함정 비글호(HMS Beagle)의 선장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마침 인근에 있던 23세 귀족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가 급히 선장으로 임명되어 비글호를 귀항시켰다. 1831년 다시 출항 명령을 받은 피츠로이는 선임자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래 과학자를 동승시켜 같이 자연을 연구하기로 하고, 케임브리지를 갓 졸업한 찰스 다윈을 선택한다. 1836년까지 계속된 탐험에서 다윈은 생명을 연구했고, 피츠로이는 기상 정보를 모았다. 이 항해에서 피츠로이는 기압과 날씨의 밀접한 관계를 알게 된다.

이후 전신이 등장하자, 피츠로이는 날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한 지역의 날씨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전보는 날씨 이동보다 빨랐다. 여러 지역의 실시간 정보를 종합하면 날씨를 미리 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상 전문가로 주목받은 피츠로이는 1854년 설립된 영국 기상청의 초대 청장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날씨를 단순히 기록하는 업무에 제한되었다. 당시 의회의 조롱에서 보듯이, 예보는 비과학적이라며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예보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자신이 개발한 기압계를 배치하고, 전신망으로 연결했다.

1859년 영국의 증기선 로열 차터(Royal Charter)호 사고로 상황이 급변한다. 폭풍에 휩쓸려 탑승자 500명 중 41명만 겨우 살아남는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기상 재난에 영국 정부는 피츠로이에게 폭풍 예보를 우선 허락한다. 일상적 날씨 예보는 계속 금지되었지만, 1860년 시작된 폭풍 경보는 재난 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였고, 피츠로이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다. 특히 미신이라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과학자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은 피츠로이는 반대를 무릅쓰고 1861년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일상 날씨를 예보하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의 시작이다. 반응은 엄청났다. 비가 올지 안 올지, 기온이 얼마나 오르고 내릴지 매일 신문에 실리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피츠로이는 처음으로 ‘forecast(예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언이나 예측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예보는 가능성이고,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자연법칙이 미래를 결정하고, 그 법칙이 과학이라 믿던 주류 학계는 이런 확률적 접근을 비판했다. 피츠로이는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며, 사재를 털어 예보 정확도를 올리려 애썼지만 지쳐갔다.

그래픽=이철원

한편, 피츠로이가 이끈 비글호 탐험으로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힌다. 급기야 학회에서 이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찬반 양측이 고함을 치며 아수라장이 된 순간, 갑자기 노신사 하나가 성경을 손에 들고 벌떡 일어서 ‘신을 믿어라!’라고 외친다. 폭풍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러 학회에 참석한 피츠로이였다. 폭풍 예보로 존경받던 피츠로이였지만 청중이 강제로 끌어 앉혔다. 종교적 신념이 강했던 피츠로이는 영국 사회가 분열에 빠지자, 다윈을 도왔다는 자책감에 빠진다. 여기에 일기예보 비난이 더해지며 가산까지 탕진한 그는 1865년 자살했다. 비글호 선장의 두 번째 자살이었다.

피츠로이의 사망으로 예보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 사이 영국 정부는 피츠로이의 예보 체계에 대한 대대적 점검에 나섰다. 탄탄한 과학으로 기상청을 재정비해 1879년 기상 예보가 재개되었고, 현재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예보 시스템을 자랑한다. 19세기 말 발전한 대기 과학의 성과는 1922년 영국의 수학자 리처드슨의 수치 기법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리처드슨의 기상 방정식 풀이법을 바탕으로 1950년대 컴퓨터를 이용한 예보가 시작되었다. 1960년 미국이 발사한 기상 위성은 예보의 신뢰도를 더욱 높였다. 이제 누구도 기상 예보를 미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피츠로이가 도입한 ‘forecast’라는 단어는 회사의 매출이나 기술 전망과 같이 미래를 대비하는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 자체 기상 위성을 도입했고, 수퍼 컴퓨터를 이용한 한국형 수치 모델은 2020년 시작했으니, 선진국에 비해 늦은 편이다. 이를 고려해도 기상 예보에 대한 실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선진국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8년 초특급 허리케인이 다가오자, 미국 기상청의 경고에 따라 무려 400만명이 대피했지만, 곧 열대저기압이 되어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국은 미국 기상청에 신뢰를 표시했다. 그래야 있을지 모를 피해에 더 과감히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미국 정부는 기상 예보에 지출한 58억달러(약 7조4000억원)의 6배 효과를 얻었다고 분석했다. 날씨는비선형 복잡계이기에 인공위성과 수퍼 컴퓨터로도 정확한 예측은 어렵다. 피츠로이가 굳이 ‘forecast’라는 단어로 미신과 구별한 이유는 예측보다 대비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기상 예보는 과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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