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장마 지나고
7월 내내 장맛비가 내려 들녘이 쑥대밭이 되었다. 20년 남짓 농사지으면서 ‘쑥대밭’이란 말을 처음 쓴다. 낮밤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 개울에 있는 다리가 물에 잠겼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집 다랑논을 타고 빙빙 돌아 산밭으로 가서, 비를 쫄딱 맞으며 들깨 모종을 심었다. 7월 말인데도 들깨 모종을 심지 못한 이웃이 많다.
가을 당근을 심을 때가 지났는데 아직 밭에 거름도 뿌리지 못했다. 이맘때면 주렁주렁 열려야만 하는 오이와 가지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토마토는 물러 터져 저절로 떨어졌다. 참깨는 비바람에 넘어져 고개를 처박거나 흙을 뒤집어쓰고 서로 엉켜 있다. 대파는 잎이 노랗게 병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땅콩밭이고 박하밭이고 어디고 하얀 선녀벌레가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느라 야단법석이다. 마을 어르신들도 올해는 선녀벌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튼 박하는 수확도 못하고 다 잘라버렸다. 당근은 뽑을 때가 되었는데? 잠깐 비 그친 사이에 한두 개 뽑아서 먹어 보니 다른 해보다 맛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주문한 당근을 보내 드리려고 한두 개 뽑아 먹어 보았더니 맛이 싱겁습니다. 그래서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맛이 없어도 드시겠다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장에서 당근을 사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맛이 조금 없으면 어때요. 음식을 맛으로만 먹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긴 장마철에 농부가 어찌 농사지은 당근인데 그냥 받다니요? 5㎏ 한 상자 더 보내주세요. 오늘 송금하겠습니다.”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살맛이 절로 나고 농사지을 힘이 솟는다. 세상엔 고마운 사람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떠한 처지에서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들녘으로 달려가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집집마다 마당 빨랫줄에 빨래가 바람에 흔들린다. 그 바람을 맞으며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이고, 내 팔십 평상 비가 이리 많이 온 거는 처음이다야. 시도 때도 없이 막 쏟아부으이 농작물이 우찌 살아 남겠노.” “고추가 빨갛게 익기도 전에 물러 터져서 쑥쑥 다 빠져뿌리네. 자네 집에 고추 농사 잘되믄 조금 나누어 주게. 농사꾼이 고추를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겠나. 흐흐.” “고성댁, 올해 참깨는 어떻노?” “어떻긴? 지나가다가 보질 않았나. 잘 자라나 싶었는데 비바람에 다 자빠져서 엉망이구먼.” “그래, 참깨 농사는 집 안으로 거두어들일 때까지는 풍년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 농사지. 농사 잘 짓고도 햇볕에 말릴 때 비가 자꾸 오면, 참깨가 달린 채로 다 썩지.”
마을 어르신들의 푸념을 듣다 보니 윗마을에 사는 청년 농부 예슬이가 한 말이 떠오른다.
“봄날샘, 제가 94년 개띠니까 올해 서른한 살이잖아요. 농사짓고 산 지 어느덧 10년이나 됐더라고요. 농사짓다 보니까 기후위기가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절벽 끝에 서 있는 듯 아주 위태롭게 말이에요. 한 해 한 해가 크게 달라요. 농부들의 일터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요. 저는 다만 다음해에도 씨앗에 싹을 틔우고, 새싹을 기다리고, 마침내 세상에 고개를 내민 연둣빛 생명을 돌보고 싶어요.”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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