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활쏘기의 미덕
효시(嚆矢)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을 말한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하면서 훗날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출발점을 뜻하게 됐다. 옛날에 한 왕자가 효시로 자신들의 병사를 훈련시켰다. 하루는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다. "내가 효시를 쏘면 모두 그 방향으로 화살을 쏴라!" 왕자는 사냥감을 향해 효시를 쏜 뒤 화살을 확인해 효시의 방향대로 쏘지 못한 부하들을 죽였다. 한 번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아끼는 말에 효시를 날렸다. 몇몇은 본심을 몰라 주저한 나머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거나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방향으로 화살을 쏘았다. 왕자는 이들도 모두 처형했다. 다시 왕자는 자신이 사랑한 부인을 향해 효시를 쐈다. 이번에도 쏘지 않았거나 맞히지 못한 이들은 옛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왕자는 아버지인 임금의 말에 효시를 쐈다. 그러자 한 명의 부하도 빠짐없이 모두 왕자의 효시가 향하는 곳으로 화살을 쐈다. 어느 날 왕자는 왕을 따라 사냥에 나섰다. 숲속 깊숙한 곳에 들어서자 갑자기 왕자가 활을 당겨 말에 탄 아버지를 겨눴다. 효시가 날아가자 부하들의 화살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던 왕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왕자는 이내 아버지 대신 왕좌를 차지했다. 이 이야기는 흉노제국의 전성기를 연 묵특선우의 이야기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한류드라마 '지옥'은 어떤 존재로부터 죽음을 통지받은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초자연적 괴물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여기에는 선정적인 온라인방송을 청취하며 신의 섭리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폭행, 납치, 살인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화살촉'이라는 집단이 나온다. 이들은 마치 묵특의 부하들처럼 이성적인 설명이나 합리적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믿는 신의 의지나 집단의 지시에 따라 맹목적으로 반응한다. 화살촉의 온라인방송 운영자는 말한다. "신이 활시위를 당기면 우리는 날아가야지요!"
옛사람들은 활쏘기를 수양의 방법으로 생각했다. 주례(周禮)는 학자들이 익혀야 할 6가지 교양 가운데 하나로 의례, 음악, 마차몰기, 서예, 수학과 더불어 활쏘기를 꼽았다. 예기(禮記)는 '마음이 바르고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았을 때 안정되고 든든하며 그런 뒤에야 과녁을 맞힐 수 있다'며 그래서 '활쏘기는 마치 덕행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제주 관아의 큰 건물인 관덕정(觀德亭)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중용(中庸)은 '활을 쏘는 것은 군자(君子)와 같아서 과녁의 중심을 맞히지 못하면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는다'고 했다. 활쏘기를 가법(家法)으로 여긴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쏘고 활을 쏘듯 조정에서도 바른 마음으로 서줄 것을 당부했다. '이미 쏜 화살'이라는 말처럼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릴 수도,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조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쏘기 전에 거듭 마음을 바로잡고 또 쏜 뒤에는 반드시 그 결과를 살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구중궁궐부터 민간의 향리까지 사정(射亭·활터)이 있어 임금부터 향촌의 선비들이 활을 즐긴 데는 활쏘기가 그저 신체를 단련하고 무용(武勇)을 수련하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묵특과 그의 부하들은 흉노를 동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만들었고 화살촉 집단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둘이 만들어낸 결과야 사뭇 다르다고 하나 진정 활쏘기의 미덕은 여기에 있지 않다. 요즘 공론의 장을 보면 이루 셀 수 없는 화살이 오가는 듯하다. 제 나름대로야 옳지 않은 화살은 없다고 하겠으나 정녕 바른 사수(射手)라면 목적이나 방향만큼이나 과정이나 평가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함께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박물관 전시실의 곧은 화살 하나가 나를 질책한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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