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끝 바라는 현의 기도,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

김진형 2023. 7. 3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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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찾은 우크라 ‘키이우 비르투오지’
이탈리아 피난 중 대관령 초청
고성·평창·춘천·동해서 공연
극적 연주 속 미소·눈물 동시에
최고 수준 연주력 감동 자아내
드미트리 야블론스키 예술감독
“음악으로 평화의 세상 열고파
모든 비극 하루 빨리 끝났으면”
▲ 키이우 비르투오지가 지난 29일 평창대관령음악제 메인공연에 참여, ‘야곱의 꿈’을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였다.

전쟁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땅에서,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곡이, 전쟁을 겪고 있는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됐다.

강원도 공연을 앞두고 서울 전쟁기념관을 따로 방문, 한국전쟁의 역사를 익히기도 한 우크라이나 오케스트라 키이우 비르투오지의 예술감독(첼리스트) 드미트리 야블론스키는 “외세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분단되고 300만명이 희생된 과정을 알게 됐다. ‘엘 말레 라하밈’을 공연하기에 비무장지대보다 더 좋은 장소를 상상할 수 없었다”며 “이 모든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한다”고 희망했다.

키이우 비르투오지는 2016년 창단 첫 해 120회 이상의 연주회를 가졌으며 세계적인 음반 회사 낙소스에서 앨범 7장을 녹음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며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번 음악제를 통해 최고 수준의 연주력으로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매 공연마다 감탄의 연속이었고 아픔을 넘어서는 예술성을 보여줬다

특히 지난 29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열린 평창대관령음악제 무대에서 이스라엘 출신 작곡가 바루크 벌리너(1942∼)의 첼로협주곡 ‘야곱의 꿈’을 선보였다. 구약성서 속 야곱의 꿈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가혹한 운명에 대한 희망의 계시다. 저음을 중심으로 처절하면서 드라마틱하게 흐른 첼로의 선율은 치명적 서사와 감정의 정수를 이끌어냈다. 첼리스트 협연자이자 지휘자로 참여한 야블론스키가 극적인 연출을 이끌어내고, 격정적인 4악장이 끝나자 연주자들이 미소와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이날 참석한 작곡가 바루크 벌리너도 무대에 올라 감사를 전했다. 앙코르로 지난 25일 DMZ박물관에서 연주한 ‘엘 말레 라하밈’을 다시 들려주기도 했다. 슬픔조차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음악을 통해 평화의 세상을 열고 싶다”고 밝힌 드미트리 야블론스키와 인터뷰를 가졌다.

-키이우 비르투오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대관령음악제 참여 소감을 한말씀 부탁드린다.

=“우크라이나 최초의 사설(private) 오케스트라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키이우에서 시즌을 보냈고 많은 투어와 녹음을 해 왔다. 양성원 예술감독의 친절한 초대에 매우 감사하다. 평창대관령음악제에 오기를 매우 기다려왔다.”

- 최근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활동을 중단했다. 70년 전 전쟁으로 길이 끊긴 고성에서 공연한 소감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엄청난 비극이다. 모든 것이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고성에서 연주한) ‘엘 말레 라하밈’은 ‘자비가 충만한 하나님’ 뜻의 히브리어 기도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인 우리는 서울 전쟁기념관도 방문했다. 외세의 이익을 위해 300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통합된 국가가 두 나라로 분단되는 과정을 보며 비무장지대보다 ‘엘 말레 라하밈’을 공연하기에 더 좋은 장소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 모든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키이우 비르투오지의 공연은 연주 실력만으로도 감동을 충분히 이끌어냈다. 지난 27일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펼친 첫 공식무대에서는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선보였다. 첫 협연자는 올해 대관령음악제 멘토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스트 콰르텟의 김성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강사로 참여한 바이올리니스트 기욤 쉬트르와의 합동 무대로 충분한 가능성을 선보였다.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박지윤이 각각 비발디의 ‘사계’ 중 봄·여름과 가을·겨울을 연주하며 역동적 울림을 선사했다. 버르토크가 1939년 작곡한 ‘디베르티멘토’ 또한 바로크 음악과 동유럽의 정서를 안겼다.

소프라노 서예리와 협연한 29일 평창 공연도 묘한 울림을 전했다. 멘델스존의 현악교향곡 10번을 시작으로 알반 베르크의 7개의 초기 가곡과 구스타프 말러의 ‘뤼케르트 시에 의한 가곡’을 선보였는데 자연에 대한 경외, 종교적 영성 등이 밀집돼 있었다. 말러의 곡 중 마지막으로 배치된 ‘나는 세상에서 잊혔네’에서는 아주 작고 낮게 “살아있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야곱의 꿈’ 중 3악장에서는 첼리스트가 신발을 벗고 무대 가운데로 올라 창세기 28장 13·14절의 히브리어 기도문을 읊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는 내용이다. 중동지역 음악을 연상시키면서도 마지막 경쾌한 울림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키이우 비르투오지의 국내 초연곡 또한 잇따라 관심을 모았다. 28일 춘천 공연에서는 알렉세이 쇼어의 ‘내 책장에서’를, 30일 동해 공연에는 같은 작곡가의 첼로협주국 ‘음악적 순례’를 국내 초연으로 선보였다.

▲ 키이우비르투오지의 예술감독 드미트리 야블론스키가 최근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야곱의 꿈’을 아시아 초연했다.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곡이다. 하나님의 소망과 약속을 밝히는 천사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유대 유산의 일부로서 특별한 작품을 연주하게 돼 기쁘다.

-첼리스트이자 지휘자로서 앙상블을 결성했다. 음악 활동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은.

=“지휘할수록 첼로를 사랑하게 되어 첼로에서 지휘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것 같다. 첼로를 연주하거나 지휘할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적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한 명피아니스트 옥사나 야블론스카야다. 최근 한국 클래식에 대한 인상은.

=“어머니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25년 동안 가르쳤고 한예종에서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훌륭한 한국 학생들이 많았고 나 또한 많은 한국 친구들이 있다. 최근에는 KBS 교향악단을 지휘한 적이 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앞으로 어떤 음악적 세계를 열어가고 싶나.

=“모두를 위한 평화로운 세상을 열고 싶다.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죽는다!”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전세계에 사는 모든 한국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정치인들도 우리가 바라는 일들을 도와주기를 기원해 보자.”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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