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약탈적 상속세’ 그대로… 2년차 尹정부 ‘맹탕’ 세제 개편안

천광암 칼럼 논설주간 2023. 7. 3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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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상속세 최고세율 韓과 같은 50%
하지만 각종 예외 및 유연 조항으로
대기업도 200년, 300년 기업 수두룩
韓 징벌적 상속세가 ‘킬러 규제’ 끝판왕
천광암 칼럼 논설주간
머크와 보쉬. 둘 다 한국 투자에 적극적인 독일 기업들이다. 글로벌 연 매출액이 각각 31조 원, 124조 원이 넘고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대기업들이다. 이 밖에도 공통점이 있다. 머크는 355년, 보쉬는 137년의 역사를 이어온 가족기업이라는 점이다. 머크는 13대째다. 두 회사 모두 창업자의 후손 일가가 지분관리회사나 공익재단 등을 통해 지배구조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머크나 보쉬 같은 기업들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 부담 때문이다. 명목상 최고세율만 보면 한국이나 독일이나 50%로 똑같다. 하지만 실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국은 경영권 승계에 대해 ‘획일적인 20% 할증률’을 적용해 60%의 상속세를 때린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제도다. 이에 비해 독일은 아들딸 등 직계비속에게 상속을 할 때는 최고세율이 30%로 낮아진다. 그나마 실제 내는 세금은 5%도 안 된다. 가업 승계 시에는 몇 가지 조건을 붙여 85%를 공제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도 가업 승계 시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대상이 제한적이고 요건도 까다롭다. 그렇다 보니 이 제도를 이용한 기업이 2021년을 기준으로 110개 사에 그쳤다. 독일의 2만8482건(2017년 기준)과 비교하면 0.4%에 불과하다. 독일에서는 이런 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에도 지분관리회사나 공익재단 등을 활용해 투기자본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고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다.

한국과 독일은 상속세를 매기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한국은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을 기준으로 상속액을 정한 뒤 물려받는 사람이 배분받아야 할 비율에 따라 나누는, 일명 ‘유산세’ 방식이다. 이에 비해 독일은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인 입장에서 받은 몫만큼 세금을 내는, ‘유산취득세’ 방식이다. 상속인이 여러 명일 때는 유산취득세가 부담이 작다.

상속세 제도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 회원국 중 ‘유산세’를 채택한 나라는 한국 미국 영국 덴마크 등 4개국뿐이다. 이 중 덴마크는 아들딸 등 직계비속에 대한 상속세율이 15%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도 상속세율이 한국보다 낮은 40%다. 더구나 미국은 상속세와 증여세를 합해 1170만 달러(약 150억 원·연방정부 기준)까지는 세금이 면제된다. 영국의 경우 집권 보수당이 상속세 폐지안을 내년 하원 선거의 대표 공약으로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독 한국만이 삼중사중의 징벌적 상속세 부과 장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꾼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하거나 부담이 덜한 다른 세목(稅目)으로 대체해 나가는 글로벌 추세에 비춰 보면 ‘겨우 시늉을 내는 수준’의 공약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27일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2년차 세제 개편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부의 편중을 막으려면 상속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과도한 상속세는 ‘기업가 정신’을 죽이고 경영권을 위협하는 등 기업의 뿌리를 통째로 흔든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은 포이즌 필, 차등의결주식, 초다수의결제 등 한국에 없는 다양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허용하고 있다. 설령 상속세 납부 등으로 인해 지분이 크게 떨어져도 한국에 비해서는 경영권 위협을 덜 느낀다. 피도 눈물도 없는 투기자본의 발톱 앞에 알몸인 채로 내던져지는 것은 한국 기업뿐이다.

윤 대통령은 이달 4일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 “기업인들의 투자 결정을 저해하는 ‘킬러 규제’를 팍팍 걷어 내라”고 주문했다. 즉시 TF가 꾸려졌고 지시 열흘 만에 산업단지 입지 규제와 화학물질 관련 규제 등 15개 개선 과제가 선정, 발표됐다. 모두 필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다 실현이 된다고 해서 기업 투자가 팍팍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과도한 상속세 등으로 기업 경영의 뿌리가 흔들리는 현실에 비춰 보면 ‘곁가지 쳐내기’ 수준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기업계에 200년, 300년 가는 ‘기업 거목’들을 키워내려면 상속세 제도를 서둘러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업 승계 공제 확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약탈적’ 상속세율 자체를 손봐야 한다. 이 정도는 해야 후일 윤석열 정부가 킬러 규제를 팍팍 걷어 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광암 칼럼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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