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임현석]충성과 의리는 어떻게 다른가
영화 ‘밀수’에서 극 초반 엄 선장(최종원)의 푸념은 윤리와 생활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간결히 함축한다. 그 장면이 의미심장한 건 영화가 이 딜레마를 깊게 파고들겠다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영화가 다루는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바닷가 촌읍 군천이다. 진숙과 춘자는 해녀로 밥벌이를 하지만, 근처에 화학공장이 들어서고 바다가 오염되자 달리 살길을 모색하다 ‘바닷속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브로커 말을 듣고 밀수에 가담한다.
진숙과 춘자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 사이지만 배경은 다르다. 진숙이 촌읍에서 선주 아버지를 둔 먹고살 만한 인물인 반면, 춘자는 열네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던 억척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신중한 엄씨 일가와 달리 춘자는 밀수판을 키우자는 쪽이다. 급기야 엄 선장 몰래 금괴까지 밀수하기로 하는데, 밀수품을 바다에서 들어올리다 세관에 적발된다.
결국 밀수판에서 손을 떼려던 엄 선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고, 그의 딸 진숙도 징역을 살게 된다. 춘자만 검거를 피해 혼자 빠져나오고, 진숙은 세관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도는 춘자에게 적개심을 키운다.
서울로 올라와 밀수품 판매업을 하던 춘자는 또 다른 거물 밀수꾼 권 상사(조인성)를 도와야 하는 처지가 되고, 결국 큰 밀수판을 벌이기 위해 군천에 내려오게 되면서 다시 진숙을 만난다. 진숙과 춘자가 재회하는 장면, 서로 뺨을 두 대씩 내갈길 때 서사는 팽팽해진다.
진숙은 아버지의 배도 잃고 곤궁한 처지로 내몰린 가운데서도 남겨진 해녀들의 리더로서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반면 춘자는 그런 그에게 큰돈을 만지게끔 해주겠다며 접근한다. 제안에 응하지 않으려던 진숙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 해녀가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다시 춘자의 손을 불가피하게 잡는다.
모두가 밀수에 가담하고 범법자인 상황에서도 영화는 선악을 명확하고도 뚜렷하게 분별한다. 이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르는 핵심축은 의리다. 영화에선 한 식구처럼 보이던 인물이 돌연 배신하며 악인이 된다. 또는 악인인 줄 알았던 인물이 여전히 서로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선의의 옹호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전환을 잘 보여주는 건 권 상사라는 캐릭터다. 그는 월남에서 사람 죽인 걸 훈장처럼 여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부하인 애꾸(정도원)를 살린 인연을 떠올릴 때 돌연 의리감을 가진 캐릭터성이 부각되면서 몰입을 이끌어낸다.
로맨스가 없는 영화에서 권 상사는 인상적인 액션 신을 통해 춘자와 미묘한 뉘앙스를 남기며, 악인임에도 동정할 여지를 만든다. 춘자를 비롯해 우직한 세관 계장(김종수)이나 해녀들을 돕는 장도리(박정민)도 의리를 축으로 선과 악을 오가는 복잡한 캐릭터들이다.
영화는 세상이 모두를 얼마씩은 악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애초에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한 것도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명백한 악행에 대해 사법적, 도덕적 판단과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는 누구나 나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실천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납득 가능해진다. 영화는 다방에서 일하는 옥분(고민시)을 비롯한 어촌 사람들의 우정과 의리를 이해에 기반한 연대처럼 다룬다. 그리고 이때의 결속은 일시적인 반목을 뛰어넘는다.
이들의 우정과 의리는 영화 속 조폭들의 충성과는 대조적이다. 상하 관계에서 비롯하는 충성은 윤리적 감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책임감도 결여돼 있다. 그들은 공감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큰 빈 틈을 남긴다. 언제나 큰 힘은 우정에서 나온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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