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의한·미동맹사]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과 협정 ‘당사자’ 논란

2023. 7. 3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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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은 교전 중인 쌍방 군대의 수장들이 일정 시점에 전투 또는 전쟁 중지를 약속하는 문서다.

6·25전쟁 정전협정문도 교전 중인 군대의 수장이 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중국이나 미국을 대표해서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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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은 교전 중인 쌍방 군대의 수장들이 일정 시점에 전투 또는 전쟁 중지를 약속하는 문서다. 이는 전쟁 관련 당사국의 정부 대표들 사이에 이뤄지는 평화협정이나 평화조약과 분명히 다른 부분이다.

정전협정문에는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대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가 서명했다. 협정문에 김일성의 이름은 서명은 있고, 이승만 대통령 이름은 없다는 단순 대비, 그리고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았다면 한국군 총사령관이라도 서명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으므로 한국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조약)과 달리 국가원수들이 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고, 또한 조약 ‘당사자’와 조약 ‘서명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주장이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정전협정문에도 당시 교전 당사국 군대의 사령관들만 서명했을 뿐 교전국의 국가 원수들은 서명하지 않았다. 정전협정문에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원수와 그를 보좌했던 영국의 로슬린 웨미스(Rosslyn E. Wemyss) 제독이 서명했을 뿐이다. 유럽 전선에 참전하고 있던 미군 사령관 존 퍼싱(John J. Pershing)은 독일군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했고,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국은 협정의 당사자로 인정받았고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은 당사국의 대표로서 베르사유 평화협상에 참여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 서명. 출처 : 국가기록원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9월 3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페어필드 기지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하던 당시에는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이 연합국을 대표해 항복조건을 제시했고, 이탈리아 측은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 원수가 이탈리아 정부를 대표하는 형식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6·25전쟁 정전협정문도 교전 중인 군대의 수장이 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중국이나 미국을 대표해서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53년 당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서명은 작전지휘권을 넘겨받았던 유엔참전국 군대들과 한국군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1954년 4월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된 제네바 정치회담에 한국이 참가했을 때 북한을 포함한 공산 진영은 한국의 당사자 자격과 관련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협상을 진행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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