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칼럼] 종전선언과 반국가세력
문정인 ㅣ연세대 명예교수
지난 7월27일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멈춰 선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53년 이날 체결된 정전협정 4조 60항은 “쌍방의 관계 정부에 정전협정 효력 발생 후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외국 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문제를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건의에도 불구하고 정치회담은 실패로 귀결됐고 공식적으로 한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동족 간 분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분쟁일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보는 시각도 다양하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70년 된 전쟁을 끝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상식이자 역사의 소명이라 외치면서 종전선언 채택을 통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서도 종전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공식 종식을 촉구하는 한반도평화법안이 미 하원에서 발의됐다. 법안을 발의한 브래드 셔먼 민주당 하원의원과 일부 재미동포 인사들은 최근 종전선언을 명기한 2018년 판문점 선언을 지지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남북관계 개선 및 군사적 긴장 완화,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 개선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 70주년보다 한-미 동맹 70주년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핵을 가진 북한과의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은 어불성설이며 대북 군사적 억제와 한-미 동맹 강화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특히 종전선언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인식은 다분히 적대적이다. 1월11일 외교·국방부 연두 업무보고 머리발언에서 윤 대통령은 “무슨 종전선언이네 하는 상대방 선의에 의한 그런 평화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가짜 평화”라고 단정한 바 있고, 6월28일 자유총연맹 창립 기념행사에서는 “반국가세력들은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의 이런 비판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객관적 사실에 관한 것이다. 2007년 10·4 정상선언에 뒤이은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는, 그해 안으로 종전선언을 채택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이를 위해 3자 또는 4자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종전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나가는 주요한 입구 역할을 하는 장치라는 남북 기본합의서 이래의 기본 전제가 깔린 문구다.
2021년 중반 문재인 정부와 바이든 행정부가 합의했던 종전선언 초안의 내용을 봐도 이러한 성격은 분명해진다. 종전선언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정치적·상징적 선언이며 이를 계기로 교착상태의 비핵화 협상을 추동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또한 종전선언 채택과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반도에 완전한 평화체제가 정착할 때까지 기존의 정전체제와 유엔군사령부를 유지한다는 게 당시 초안의 뼈대인 것으로 안다. 그리고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일방적으로 읍소한 것이 아니고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해 대북제재를 보다 탄력적으로 운용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를 ‘가짜 평화’ 운운하는 것은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한 결과로밖에 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윤 대통령 발언에 담긴 이념적 흑백논리다. 대통령 말대로라면 종전선언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이뤄내고자 하는 이들은 ‘자유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반국가세력’이 되는 셈이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대통령제가 승자독식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고는 해도, 상당한 수의 유권자와 정치세력이 지지했고 전임 정부가 채택했던 정책 방향을 체제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본질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국민에 의해 위임된 것이고 그에게는 국민적 합의를 통해 외교·안보 정책을 수립,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내 지지세력 결집을 위한 도구로 적대적 이분법을 꺼내 들고 상대를 적대화하는 일은 민주적 숙의 시스템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국가안보 자체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지난 정부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역사적 맥락과 사실관계에 근거해야 한다. 그래야 실사구시의 대승적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섣부른 ‘반국가세력’ 언급이 과연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안보 정책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지지세력에 보상을 주고, 중도세력의 지지를 확장하는 동시에, 적대세력을 최소화하는 것’은 성공적인 민주정치 리더십의 필수적 자질이다. 윤석열 정부의 성공 역시 이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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