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혼자 나라 구했나? [한겨레프리즘]

권혁철 2023. 7. 3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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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지난 5일 오후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의 동상 제막식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 백선엽 장군의 장녀 백남희씨, 이철우 경북도지사, 이종섭 국방부 장관 등이 제막하고 있다. 연합뉴스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호국의 별”,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최고의 전쟁영웅”….

지난 5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있었던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쏟아진 고인에 대한 칭송들이다.

이명박 정권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2010년 한국전쟁 60주기 기념행사의 하나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시도했다. 2009년 3월 국방부도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백 장군을 명예원수에 추대하는 것은 국군 건군 이념을 훼손한다’는 기사를 썼다. 하지만 국방부는 내부 문건에서 “일부 언론이 부정적인 의견을 제기하고 있지만, 6·25 참전용사의 대표로서 군 내외의 존경을 받는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를 통해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높이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 차원에서 적극 추진하는 게 필요하다”고 밀고 갔다.

순항할 듯하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가 뜻밖의 ‘암초’에 부닥쳤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 원로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국회 국방위에서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명예원수 추대와 관련해 “군 관련 인사들의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며 “일부 (군) 원로들이 백 장군의 6·25전쟁 공과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 국방부는 “원로들이 군 생활을 하며 생긴 백 장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라며 반대 의견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같은 군내 신망이 두터운 원로까지 반대에 동참하자, 국방부도 더 이상 ‘일부의 사감’으로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당시 군 원로들의 반발은 거셌다. 한 인사는 김태영 장관을 찾아가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그만두어라”고 직언했고, 명예원수 추대가 건군 이념을 훼손한다며 헌법 소원을 내겠다는 인사도 있었다. 반대하는 군 원로들의 자필 편지 수십 통이 ‘이명박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 중에는 “백 장군의 비열한 과거를 폭로하겠다”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국방부가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들었다.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백 장군 혼자 나라를 구했느냐는 반론이었다.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이 사단장이던 육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파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상징적인 전투라고들 한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는 240㎞ 낙동강 방어 전투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다. 다부동 전투에는 한·미 8개 사단이 참여해, 육군 1사단은 8개 사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백 장군의 공적이 부풀려진 것이다. 한 원로는 “북한군의 남침 때 개성과 38선을 경계하는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은 제대로 응전도 못 하고 거의 모든 장비를 버리고 패주해 서울 조기 함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며 ‘한국전쟁의 영웅’이란 평가에도 의견을 달리했다.

둘째,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운동을 토벌했던 백 장군의 친일 행적이었다. 일제 앞잡이가 국군의 첫 명예원수가 되면 항일독립운동에 뿌리를 둔 국군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자칫 북한에 6·25 남침을 ‘일제 잔재 소탕 전쟁’으로 정당화하는 핑계를 주게 된다는 우려였다. 독립유공자 단체인 광복회까지 반대하자, 국방부는 “갈등 조장과 백 장군 명예 실추 우려”를 이유로 명예원수 추대 계획을 접었다.

윤석열 정부는 해묵은 ‘백선엽 논란’을 다시 꺼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24일 국립현충원 누리집에서 백 장군의 ‘친일 문구’를 삭제하면서 “최대 국난인 6·25전쟁을 극복한 최고 영웅인 백 장군의 명예를 지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13년 전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에 반대했던 군 원로들이 상당수 숨졌으니, 눈치 안 보고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인가. ‘백선엽 논란’의 공연한 재론이 고인의 명예 실추인지 명예 수호인지 헷갈린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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