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시, 내 허기진 날의 순하고 선한 이정표

한겨레 2023. 7. 3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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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시인! 얼마나 고고하고 영예스러운 이름입니까. 시인! 얼마나 흔해 빠지고 헐가(歇價·제값보다 훨씬 싼 값) 해버린 이름입니까.”

현대문학 창간호(1956년 8월)에 조지훈 시인이 후배 시인을 추천하며 썼던 글 일부다. ‘고고하고 영예스러운 이름’에서 먹먹해지고 ‘흔해 빠지고 헐가 해버린’에서 막막해졌다. 무엇보다 70여년 전에, 그것도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한달 전 인공지능(AI)이 쓴 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직후라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지난해 인공지능이 쓴 시집 ‘시를 쓰는 이유’와, 인공지능과 협업한 젊은 시인들의 시집 ‘9+i’가 발간됐다. 게다가 챗지피티(ChatGPT)가 상용화하면서 누구든 주문하면 실시간 번역으로 시를 써준다.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직후 “알파고와 시인이 시를 겨룬다면”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좋다는 시를 죄다 학습한 알파고가 이긴다, 알파고가 99명의 시인을 이길 수는 있어도 1명의 뛰어난 시인을 이길 수는 없다, 인간 고유의 마음자리인 시심(詩心)에서 시를 긷는 시인이 이긴다, 돈 안 되는 대결이라 세상 관심 밖의 일이다, 이 네개 가능성 중시심에서 시를 긷는 시인이 이긴다에 표를 던졌다. 이때만 해도 인공지능이 인간영역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시 창작까지 잠식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요즘 시는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어. 인공지능 시보다 더 인공지능 시 같아. 매체에서도 시를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졌어. 명실상부하게 시는 무능하고 무의미해졌어. 이런 말들에 시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 이제, 시는, 정말, 시험을 위한 교과서에만 존재하는가? 인공지능이 써대는 맞춤형 서비스로만 소비되는가? 진정한 시인은 어디 있는가? 시는 누가 읽는가? 이런 시대에 시인의 ‘고고’와 ‘영예’는 또 얼마나 ‘헐가’ 해버릴 것인가.

당신은 시를 읽습니까? 얼마나 자주 읽습니까? 언제 읽습니까? 지금, 당신이 사랑하거나 헤어졌다면,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로 인해 불행하거나 절망한다면, 출구를 잃고 우울하거나 불안하다면, 외롭거나 고립된 채 자신이 무력하고 무용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우리 삶 혹은 인간의 디폴트값! 중력과도 같은. 그런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날기를 꿈꾼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만나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뭔가를 산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춘다. 명상하거나 기도하고, 소설을 읽거나 시를 읽기도 한다. ‘절망 전에 짜내는 마지막 의지’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근데 정말 시를?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40여년 전 종교와 이데올로기와 청춘의 무게에 짓눌렸던 스무살의 내가 읽고 경험했던, 한용운 시인의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구절이다. ‘당신’처럼 한 세계가 열리면서 그때 ‘시가 내게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시는 내게 마음과 세상(밖)을 잇는 기도이자 나를 일으켜 세상에 세워두는 응답이었다. 고단한 일상과 미친 경쟁의 속도 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은 정지이자 정화였다. 잠시 멈춰 갇힌 숨을 몰아쉬며, 고즈넉이 고단함을 위로하고 넘치는 제 그릇을 조금 비워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는 내 허기진 날에 순하고 선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현실이라는 고통의 무게 앞에서 한 시인은 신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왜 삶을 이토록 견딜 수 없이 만들어놓고/ 나를 사면의 벽 안에 두었는가”(이보르 거니, ‘신에게’). 시는 이런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물음이 많을수록 세계는 넓어지고 감정과 사유 또한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다는 건 발 딛고 선 현실과 그 ‘바깥’을 향해 물음을 던지는 일이며, 가장 ‘나’다운 시선과 자세를 얻는 일이다. 시의 본성이 “연결되려는/ 돌진. 공동 언어의 꿈”(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의식의 기원과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때 시야말로 상상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도화선이 된다. 얘기되지 못한 것들을 얘기하고 이름없는 것들에 이름을 주기 위해. 다른 감정, 다른 나,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개진하기 위해. 그리하여 다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낭만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죽기 전 “나는 지금 생의 더 많은 시간을 시와 보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시를, 그것도 자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이렇게 차고 넘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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