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리가 잘 날뛴 ‘악귀’의 교훈.. ‘인생은 소중한 축복!’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래 살아보자!”
SBS의 한국형 오컬트 미스터리 드라마 ‘악귀’가 29일 구산영 역 김태리의 독백 한 마디로 막을 내렸다.
결국 작가 김은희는 12회를 끌어온 작품을 통해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기획 의도에선 청춘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어른의 의미와, 이 시대 돈의 의미를 조명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인생이란 소중한 기회이니 힘들지언정 살아내는 자체가 축복’이란 메시지, 그 하나를 강렬하게 전달했다.
최종회에서 악귀는 절규한다. “우린 살려고 했어! 먹을 게 없어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고 친자식까지 팔아 넘겨 가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악을 했어! 근데 니들은 죽고 싶어 하잖아. 외롭다고, 힘들다고 죽고 싶어 하잖아! 진짜 외롭고 힘든 게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그렇게 원하던 인생이란 걸 포기하려 했다고!.. 그럴 거면 내가 살게.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다하면서 그렇게 살게. 그러니까 나를 살려줘!”
요즘 흔한 극단적 선택과 인명 경시 풍조에 대한 통렬한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스스로도 하찮게 여기는 인생조차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 지를 강조하기 위해 아예 몸을 못받은, 삶을 꾸리지 못하는 귀신들을 등장시켰다. 또한 귀신까지 만들어내는 인간의 탐욕을 통해 그 소중한 인생을 스스로 쓰레기통에 처박는 군상들도 조명했다. 아울러 과욕은 인간이든 귀신이든 파멸로 이끈다는 메시지도 함께 담았다.
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차용한 미스테리 기법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구강모가 남긴 ‘붉은 댕기, 옥비녀, 흑고무줄, 푸른 옹기조각, 초자병, 악귀는 태자귀’란 메모로부터 시작된 이 미스테리는 다분히 작가 주관적으로 풀리긴 했지만 서스펜스 효과를 극대화 시키며 마무리 되었다.
작가 주관적이란 말은, 가령 무당 최만월은 나병희(김해숙 분)의 젊은 시절 “악귀를 없애고 싶을 때 다섯 가지 물건과 이름을 사용하라”면서 “애가 보통 질긴 게 아니라서 사람한테 달라붙을 수 있으니 그때는 진체를 없애라”고 조언했다. 구강모(진선규 분) 역시 ‘죽임을 당한 자의 기운이 담긴 물건’들을 통해 악귀를 금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염해상이 막판 깨우친 것은 다섯 가지 물건을 다 모으면 그림자와 본체가 바뀐다는 사실이었다. 즉 시청자는 악귀 전문가 최만월과 구강모의 말에 휘둘리게 해놓고 염해상을 통해 상반된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어쨌거나 메모 속 5가지 매개체와 악귀의 진명은 거울 속, 그리고 그림자 속 악귀를 소멸시키는 효과가 있다. 끝내 염해상이 마지막 옥비녀마저 봉인했다면 이미 거울 속에 갇힌 구산영의 영혼은 소멸됐을 것이다.
한편 최만월 표현 ‘보통 질긴 게 아닌’ 악귀 이향이(심달기 분)의 욕망은 거창했다. 단지 구산영을 조정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구산영의 영혼을 소멸시켜 그 몸을 차지하고, 채 못살았던 인생을 향유하고 싶어했다.
이 대목에서 구산영의 몸을 차지한, 그래서 구산영답게 행동하는 악귀를 표현한 김태리의 연기는 소름끼친다.
“나 예전처럼 구질구질하게 안살려고 엄청 노력할 거거든. 그러니 엄마도 노력해야지.” 할 때는 다정하게 호소했다. 이어 “난 엄마를 사랑하는데 엄마는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 할 때는 연민 들도록 처연했다. 그리고 “엄마잖아. 엄마면은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해야지!” 할 때는 고양이처럼 앙칼졌다. 다시 “엄마도 그 년이 살고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또 그런 엄마면..” 할 때는 차라리 울 듯했다. 마지막으로 “난 필요 없는데” 덧붙일 때는 싸하게 비웃어 버렸다. 한 소절의 대사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김태리의 표정과 딕션은 널 뛰는 악귀의 감정을 닭살 돋게 표현했다.
한편 거울 속 구산영은 평소처럼 행동했다. 알바에 늦어 서둘러 나가다 대꾸 없는 엄마 경문(박지영 분)의 방을 열었을 때 본 만월그림. 그 때부터 고난은 시작됐다. 정체불명의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당하고, 도망가고, 그 모습을 천공을 가득 메운 불길한 만월이 지켜보고.. 그 곳은 산영의 심상 속 세계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산영은 마침내 의문의 공격자를 대면했다. 그 정체는 바로 산영 자신이었다.
“나는 한순간도 나를 위한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어,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해본 적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 본 적도.. 나는 왜, 누굴 위해 스스로에게 가혹했을까? 어둠 속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얼굴은 내 얼굴이었어. 내가 날 죽이고 있었어. 그걸 깨닫고 나니 죽을 수가 없었어.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걸 택할 거야. 오로지 나의 의지로 살아가 볼 거야.”
거울 속 구산영이 말했다. 이향이의 진체, 뼈만 남은 손가락을 염해상으로부터 탈취한 악귀의 발목을 멈춰 세우며. 이미 사람의 신체에 구속된 악귀는 거울 속 산영의 의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전의 악귀 이향이가 거울 속, 혹은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강요했을 때처럼 악귀는 고통스럽게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애원하면서 산영의 의지를 따라 자신의 손가락을 불태우고 만다. 애증의 고향 바다를 떠올리며 향이의 악귀는 그렇게 소멸된다.
악귀가 사라진 이후 산영은 달라진 일상을 회복한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며 행복을 되찾는다. 앞으로 예고된 불행, 시력을 잃을 때를 대비한 연습도 해나간다. 정작 눈이 멀었을 때도 그 불편이 행복을 깨지 않도록.
산영은 염해상과 함께 안동의 부용대도 찾는다. 사람들의 기원을 축복하고 길을 잃고 떠도는 귀신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선유줄불놀이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과, 행복해 하는 귀신들을 보며 다짐한다. “그래 살아보자!”
드라마는 디테일도 좋았다. 가령 악귀가 향이의 손가락을 되찾기 위해 구산영의 몸으로 자해한 이마의 흉터를 끝까지 남겼다. 곁가지 로맨스도 없었다. 이홍새(홍경 분)와는 말미에 함께 커피 마시는 장면만 넣었다. 두 사람은 바람에 휘날리는 벚잎을 보며 “예쁘다. 눈 같네요.” “그러네. 그 날 같다” 정도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선유줄불놀이와 함께 커피내리는 윤경문 귀엔 “미안해”란 구강모의 음성이, 사건 자료 살피는 이홍새 귀엔 “잘하고 있어”라는 서문춘(김원해 분)의 음성이 들리며 그 영혼들이 천도됐음도 암시했다.
이렇게 인생은 소중하고 스스로 아껴야 됨을 강조하며 드라마 ‘악귀’는 성공적인 피날레를 맞았다. 한 마디로 잘 본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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