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용기를 얻은 그 곳…타인의 취향이 나를 위로한다
운교산방 몽상가의 시골집 운영하는 김경씨, 취향을 느끼고 공감하는 ‘남의 집’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IC)으로 나와 42번 국도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다보면 어느새 주위에 차가 하나둘 없어진다. 언덕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집은 줄고 푸른색의 산세는 깊어졌다.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달린 지 30여 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다다랐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 해발 600m에 있는 고랭지 마을이다. 마을회관 옆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길을 따라 1㎞ 정도 더 올라갔다. 집과 밭을 지나 차로 갈 수 있는 포장도로 맨 끝에서야 목적지를 만났다. 해발 700m, 백덕산기슭에 있는 ‘운교산방’이다. 운교리 산골 마을에 있는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허리까지 오는 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성한 풀과 커다란 뽕나무가 반긴다. 마당 한편에 있는 계단 옆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다. ‘몽상가'. 하루 묵고 갈 에어비앤비다.
두두두두두두. 테라스에 들어서자 굵은 장맛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지붕을 따라 내려온 빗물이 열어둔 창문 앞 난간에 주르륵주르륵 떨어졌다.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빗소리가 차단되며 고요해졌다. 거실 구석 벽난로 옆에 놓인 턴테이블이 낯선 여행자를 반긴다. 한쪽 벽면을 채운 서랍엔 엘피(LP)판이 가득했다. 그 위로 범상치 않은 그림이 걸렸다. 주인 없는 집에 홀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어색함이 든다. 이곳이 만 하루 동안 지내게 될 ‘남의 집’이다.
포카라 호텔에서 느낀 온기
2023년 6월26~27일 호스트 김경(50)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머물렀다. “강원도 평창, 700m 고도 위 쉼여행 최적지. 산과 구름, 몇 채의 민가와 고랭지 채소밭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진짜 시골 여행 (…)” 에어비앤비 앱에 올라와 있는 시골집을 소개하는 첫머리다. 정직한 설명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집 앞의 밭에서 농사짓는 이웃집 농부 외엔 이곳 도로까지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일주일에 두세 번 오는 집배원이 유일하다. 주변에 관광지라고는 가장 가까운 곳이 차로 20분 거리의 스키장이다. 물 하나 사려 해도 차를 타고 5분은 나가야 한다. 이런 곳에 에어비앤비라니. 집주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김경이 평창에 자리잡은 건 10년 전이다. 2013년 화가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이주했다. 막 이사 왔을 때까지만 해도 에어비앤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자신은 전업 작가로 글을 쓰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러다 굶어 죽겠더라고요. 글 쓰고 그림 그려서는 먹고살 길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제가 좋아하는 걸 생각했어요. 제가 워낙 여행을 좋아하거든요. 그때 네팔 포카라가 떠오른 거예요. 2000년쯤 네팔 포카라에 갔어요. 거기에서 1만원 정도 되는 호텔에 머물렀는데, 인생에서 가장 큰 충족감을 느꼈어요. 상업적으로 세팅한 숙소가 아니라 진짜 그들의 삶에서 나오는 온기와 취향이 있었거든요. 그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평창에 오기 전까지 평생 서울에서 살았다. 유행과 패션, 문화의 최전선에 있었다. 한 패션잡지 기자로 17년 일했다. 기자생활은 재밌고 성취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벅차기도 했다. “경주마처럼 트랙 안에 갇혀서 결승선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일하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게 저 자신한테 정신적으로 큰 압박을 줬던 것 같아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 그에겐 독이었다. “영혼을 팔아서” 일했지만 들인 에너지만큼 쌓이는 건 없었다. 회사의 일부분으로 소모되는 것에 공허감이 들었다. 그는 회사생활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고 기억했다. 그래서였을까. 김경은 늘 ‘몽상가'처럼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다른 세계를 꿈꿨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또는 여행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세계의 문을 두드렸지만 충족되진 않았다. 멈출 줄 모르던 공허한 달리기는 40대가 넘어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서야 멈췄다.
상업적 공간이 아닌 호스트의 취향이 밴 ‘집’
부부는 시골집 옆 공터에 남편 작업실용으로 짓던 건물을 집으로 만들고 원래 살던 시골집을 에어비앤비로 내놓기로 결정했다. 건축의 건 자도 몰랐지만, “구석기시대에 움막을 짓듯” 삽질하고 뼈대를 만들고 벽을 세웠다. 집을 다 지은 뒤엔 시골집을 리모델링했다. 재활용센터에서 남은 자재를 가져와 테라스 지붕을 만들었다. 직접 페인트칠하고 침대 프레임도 남편이 직접 짰다. 그렇게 2016년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다.
에어비앤비는 숙박업의 일종이지만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펜션 등의 숙박과는 다르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 이 플랫폼은 ‘숙박 공유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른 숙박시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호스트의 ‘취향’이 밴 공간이라는 것이다. 시설을 찾는 모두에게 같은 서비스와 경험을 제공하는 상업 숙박시설에선 주인의 취향을 느끼기 어렵다. 결국 에어비앤비는 타인의 온기와 취향이 밴 집에 잠시 사는 것이다.
김경이 처음 공간을 대여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에어비앤비를 떠올린 것도 여행에서 경험한 타인의 취향 때문이었다. 2004년 프랑스 파리를 갔을 때 그는 호텔이 아닌 예술가가 사는 아파트 공간 일부를 대여해 사용했다. 당시 에어비앤비는 없었지만, 집주인이 자신이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내주는 방식이었다. 그 공간엔 집주인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화집부터 레코드, 책이 있었다. “좁은 아파트였는데 절대 누추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 음악을 들으니 너무 좋더라고요.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됐고요. 저도 나중에 공간(대여)을 하게 되면 이런 문화를 좀 반영해야겠다고 그때 생각한 것 같아요.”
시골집을 시작으로 김경 부부의 취향이 듬뿍 밴 집이 하나씩 늘어났다. 마당 한편에 있는 LP 보관 창고를 개조해 별채를 만들었고 부부가 살 집을 만들면서 한편에 조그마한 방을 또 만들었다. 남편과 자주 놀러 가던 강원도 횡성호 앞 몇 년 동안 방치된 음식점을 인수해 에어비앤비로 꾸미기도 했다. 위치도 외형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집이 있는 장소부터 집 안의 책과 디브이디(DVD) 등 소품 모두 김경 부부의 취향이 반영됐다는 점이다. 모든 집은 직접 짓거나 기존에 있던 집을 손수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취향에 공감하고 온기에 위로받고
호스트와 게스트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다. 에어비앤비 방침상 호스트는 자신이 꾸민 공간을 설명해야 하고 게스트는 자신의 정보와 여행 목적을 전달해야 한다. 서로가 맞는 사람을 찾아갈 수 있다는 소리다. 김경도 자기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게스트는 정중히 사양하고 있다. ‘턴테이블은 매우 섬세하게 다루셔야 합니다. (…) 에너지 절약이 필수인 집입니다. (…) 부디 잘 읽어보시고 예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대로 놓고 가는 사람, 레코드를 다 막 던져놓고 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사전에 막으려고 일부러 숙소 규칙이 굉장히 까다롭다고 처음부터 그걸 공지해요. 그래서 겁을 집어먹는 사람이 많아요. 근데 생각보다 오면 편안해서 그런 공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게 싫은 사람은 얼마 안 돼서 취소하니까 본인도 좋고 저도 좋은 거예요.”
호스트의 취향이 깊게 밴 이곳에 온 이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갔을까.
“엘피판 뒤적거리며 아는 노래가 있나 살펴보고 돌고 돌아 김광석 엘피판을 틀어놓는다. 몇몇은 아는 곡 몇몇은 모르는 곡 핸드폰으로 틀었으면 분명히 다음 곡을 눌렀을 텐데 내 취향이 아닌 곡을 듣고 있으니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화려하나 단아한 주인장의 필체로 쓰인 그녀의 책을 맛있게 읽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게스트들의 글엔 김경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주인의 취향에 공감했고 그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집 자체에서 위로받은 이도 있었다. 스물넷의 청년이 남긴 글이다.
“저는 이곳에 도망 왔어요. 다소 절망적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내 아픔을 드러낼 수 있어요. 처음엔 그저 온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숙소에 가서 나의 끝없는 우울감을 달래고자 했어요. 나의 이 무서운 우울감을 잠시 모른 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행 왔다기보다 정말로 여기 도망 왔어요. 운교산방에서 나는 위로받았어요. (…) 그래서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었어요. 주변 사람들의 백 마디 위로보다 그냥 이곳에 온 것만으로. 그래서 나는 이곳을 나를 구해준 공간이라고 해요.”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
김경과 이야기를 마치고 LP를 추천받았다. 난생처음 본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바늘을 내려놓자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주인의 취향이 담긴 노래를 들으며 선반 위에 놓인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상소 지음)를 집어들었다. 접혀 있던 부분이 자연스레 펼쳐졌다.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느슨하게 소파에 기댔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끝에 닿자 음악 소리도 잦아들었다. 고요한 거실에서 그렇게 한동안 있었다. 집주인의 취향이 이런 것이었구나.
평창(강원도)=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특별한 변신, 한 가지 주제로만 제작하는 통권호를 아홉 번째 내놓습니다. ‘21이 사랑한 작가 21명’,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비거니즘의 모든 것, 비건 비긴’(Vegan Begin) 등에 이어 ‘집’을 열쇳말로 삼았습니다. 한옥, 농막, 협소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집에 깃든 사연, 반려동물을 위한 집, 미니멀리즘 등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담은 집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다양한 집의 존재 이유와 미래 전망도 더했습니다. _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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