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인들의 호의, 한국 외교의 오만 [아침햇발]

박민희 2023. 7. 3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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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지난 17일 이스파한의 이맘 모스크 앞 광장에 전 최고지도자 호메이니(왼쪽)와 현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오른쪽)의 대형 초상화가 설치되어 있다. 이스파한/박민희

박민희 | 논설위원

이란 남부 쉬라즈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가야하는 페사르가데는 얼핏 보면, 보잘 것 없는 유적이다. 높이 2미터 남짓한 돌 무덤과 부서진 옛 도시의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이곳은 기원전 6세기에 이란·이집트·인도·중앙아시아 등을 아우른 ‘세계 최초의 제국’인 아케메네스 제국을 통치한 키루스 대제의 무덤과 수도다. 그는 수많은 피정복민들에게 특정 종교와 문화를 강요하지 않고 포용의 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키루스 대제는 지금 이란인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슬람 통치 체제가 보수적 규율을 강제하는 데 반발하는 이란인들은, ‘진정한 이란의 통치자는 키루스 같은 이여야 한다’는 의미로 페사르가데에 모여 시위를 벌이곤 한다. 지난 21일 찾아간 페사르가데에서도 히잡을 쓰지 않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키루스 대제 무덤을 향해 존경을 표하는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9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숨진 여성 마사 아미니를 추모하며 이란 곳곳에서 일어난 ‘여성, 삶, 자유’ 시위는 멈췄다. 강경진압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명했고, 감옥에 갇혔다. 해외로 떠나야했던 여성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침묵 속의 저항은 계속된다. 거리 곳곳에서 히잡을 아예 벗어버리거나 히잡을 목에만 살짝 걸친 채 머리카락을 드러낸 많은 젊은 여성들의 모습은 ‘변화를 원한다’는 단호한 선언 같다. 이스파한에서 만난 상인 호세인은 “지금의 상황은 재와 같다. 불씨는 재 밑에 있다가 언제든 다시 번진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실에 다들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40대의 여성 교사는 “아미니의 1주기인 9월이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 21일 페사르가데에 있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 키루스 대제의 무덤 앞에 한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은 채 서 있다. 페사르가데/박민희

2018년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핵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란에 대한 경제·금융제재를 강화한 이후 이란 서민들의 생활은 매우 힘겨워졌다. 하지만, 특권층, 부유층들에게 제재는 그리 나쁘지 않다. 정부, 특히 군대와 연줄이 있는 이들은 밀수 등으로 돈을 벌 기회가 늘어나고, 외국 기업들이 사라진 시장에서 이란 대기업들은 더 큰 이윤을 챙긴다. 고급 백화점과 레스토랑은 제재 속에서 더욱 화려해졌다. ‘종교·군·산업 복합체’는 더욱 강고해졌다.

재재와 미국의 압박에 맞서기 위해, 이란 정부는 중국과 전면적 전략 협력 협정을 맺었다. 이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한국 기업과 제품들이 미국 제재 때문에 철수하면서 생긴 공백은 중국 제품과 기업들이 채웠다. 7월 말 이스파한, 쉬라즈, 야즈드에 있는 이란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유적들에서 마주친 외국인 여행자의 90% 이상은 중국인이었다.

‘중국화하는 이란’에서, 한국은 지워진 듯 보인다. 한국이 미국의 제재에 따라 이란과 관계를 단절하면서, 한-이란 관계는 위기에 빠졌다. 특히 한국이 이란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한 대가로 지불해야 하지만, 미국 금융제재로 돌려주지 못한 채 5년 넘게 우리은행에 묶여 있는 약 70억달러(약 9조원)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졌다. 이 돈을 돌려주려면,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타결되어 제재가 완화되어야 한다. 협상은 여러차례 타결 직전까지 갔다가 허물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국의 ‘돈 돌려주기’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 박물관에 페르시아어와 영어, 중국어로 쓰여진 안내문. 페르세폴리스/박민희

거리에서 만나는 이란인들의 민심은 다르다. 한국인이란 말에 ‘코레 헤일리 후베(한국 매우 좋다)”라며 미소가 번진다. 젊은 여성들은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고,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며 환호한다. 이란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주몽’ ‘대장금’부터 BTS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이 축적되었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강대국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위협적이지 않은 선진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란과 중국 정부의 ‘반미 연대’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중국 관광객과 기업들에 대한 이란인들의 민심이 싸늘한 것과도 대조적이다.

한국은 다시 이란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이란의 협상 타결과 제재 완화가 없다면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그 틈에서도 한국은 ‘위협적이지 않은 겸손한 선진국’ 외교를 계속 발전시켜갈 필요가 있다. 8500만 인구에 중동에서 역사·문화적으로 가장 깊은 저력을 가진 이란으로 이어진 길을 끊어버려서는 안된다.

이란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동남아 등에서 한국은 식민통치와 전쟁을 딛고 일어선 ‘제조업과 문화 선진국’으로 호평받지만, 정작 한국은 ‘한반도와 4강 외교’를 넘어 다양한 국가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오만한 편견을 내비친다.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 발언으로 이란의 반발을 부른 것은 상징적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임 정부의 외교를 ‘남북관계에만 치우친 친중·친북 외교’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의 설계도’에 나오지 않는 한국 스스로의 외교를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제대로 노력하고 있는가. ‘글로벌 중추 국가’라는 오만한 구호보다는, 그동안 무관심했던 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더 진지하게 배워나가면서 접점을 넓혀가는 겸손하고 포용적인 외교에 한국의 길이 있을 것이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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