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맞은 ‘평창대관령음악제’, 자연과 평화가 건반 따라 흐르네
피란중인 우크라이나 악단 공연도
다음달 5일까지 11일간 열려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으로 달리는 고속버스 창밖으로 짙게 우거진 산록이 첩첩이 펼쳐졌다. 기자는 지난 26~27일 이틀 동안 제20회 평창대관령음악제를 다녀왔다. 도심의 아찔한 열기를 피해 강원도의 녹음과 클래식의 선율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스무해를 거치며 명실상부 한국 대표 클래식 축제로 성장한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자연’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풍성한 들을거리를 선물해줬다.
100명이 불러온 ‘알프스의 대자연’
26일 개막공연은 야외공연장인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열렸다. 1000석 규모 객석이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연 전 올해부터 예술감독을 맡은 첼리스트 양성원이 무대에 올라 “모든 공연에서 자연과 연관을 맺는 곡들을 들으실 것”이라며 “지구온난화 때문에 인적·물적 피해가 많이 발생하는데 어떻게 자연과 함께 살아갈지 생각해 주신다면 뜻깊겠다”고 말했다.
첫 무대는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1번 중 ‘아침의 기분’이었다. 사하라 사막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한 곡이다. 최수열이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날 소나기가 내렸지만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먹구름이 저녁놀에 뺨을 발갛게 붉히며 물러갔다. 대관령의 산기슭을 타고 촉촉하게 젖은 풀꽃 냄새가 밀려왔다. 저녁이었지만 ‘아침의 기분’은 상쾌하게 축제를 여는 축하곡으로 제격이었다.
이어 지난해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에서 더 유명해진 피아니스트 윤홍천, 첼리스트 양성원이 경기필과 함께 베토벤 ‘삼중 협주곡’을 선보였다. 윤홍천의 곡진한 피아노에 양성원의 중후한 첼로가 더해졌고, 양인모의 격정적인 바이올린 활질은 종종 선뜩하게 가슴을 베는 듯했다.
이날 공연의 대단원은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이었다. 슈트라우스가 알프스 등산 경험을 장엄한 대자연의 교향시로 완성한 작품이다. 이 곡은 대규모 연주 인력이 필요해 공연이 성사되기 어렵다. 1947년 영국 런던의 슈트라우스 음악제에서 슈트라우스 본인조차 지휘를 원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현악기 확대 편성, 4관 편성, 하프 2대, 팀파니 2대, 오르간에 윈드 머신(풍음기)과 선더 머신(뇌음기)까지 동원해야 한다.
경기필 단원 100여명이 총출동해 50분간 뿜어낸 라이브 연주의 박력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몇번이나 몸이 찌릿찌릿하게 전율하는 경험을 했다. 알프스 교향곡은 단일 악장이지만 ‘폭포의 요정’ ‘알프스 들판에서’ ‘정상에서의 풍경’ 등의 22개 부분으로 나뉜다. 특히 ‘뇌우와 폭풍우’ 부분에선 경기필이 뮤직텐트 안에 폭풍우를 불러온 듯했다. 최수열은 악보를 통째로 외워 보면대 없이 지휘했다.
경기필이 연주를 끝내고 최수열이 지휘봉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까지 수초간의 고요가 잊지 못할 여운을 남겼다. 관객 수십명이 튀어오르듯이 기립박수를 쳤고 분위기는 록 콘서트장처럼 달아올랐다. 경기필이 앙코르 연주 없이 자리를 뜨자 일부 관객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공연 중에 나방 몇 마리가 뮤직텐트로 들어와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모습조차 ‘자연’이라는 테마와 썩 어울렸다.
우크라이나 악단, 절망을 희망으로
27일은 쨍하게 파란 하늘 밑으로 대관령의 산록과 능선이 선명했다. 낮 공연인 ‘스페셜 트리오’는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첼리스트 양성원,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피아니스트 윤홍천 3인이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의 협주곡으로 호흡을 맞췄다. 저녁 공연을 보기 전에 한숨 쉬어가도록 소품을 마련한 느낌이었다.
저녁 공연에는 특별한 손님이 알펜시아 콘서트홀 무대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현악 앙상블 ‘키이우 비르투오지 스트링 오케스트라’였다. 이들은 러시아의 침략 때문에 이탈리아로 피란했다가 지난 24일 입국해 평창에 왔다. 이날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박지윤과 협연해 비발디 ‘사계’를 선보였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악장인 이지윤은 전반부인 봄·여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악장인 박지윤은 후반부인 가을·겨울을 나눠 맡았다. 키이우 비르투오지는 연습 시간이 부족했던지 잠시 호흡이 흔들렸지만, 이지윤·박지윤이 능숙하게 완급을 조절하면서 강한 기세로 이끌어 나갔다. 두 협연자 모두 활털 일부가 끊어져 나풀거릴 정도로 힘찬 활질을 보여줬다.
좋은 곡을 발굴하는 기쁨도 음악제를 즐기는 방법이다. 키이우 비르투오지가 이어 들려준 곡은 관객에게 다소 낯선 버르토크 벨러의 ‘디베르티멘토’였다. 디베르티멘토는 ‘기분 전환’이라는 의미로 버르토크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작곡했다. 이 선곡은 조국의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키이우 비르투오지의 의지처럼 보였다.
앞서 개막 전날인 25일 키이우 비르투오지는 북한과 맞닿은 강원 고성군 DMZ박물관에서 우크라이나 민요에 더해 바루크 벌리너가 작곡한 ‘자비로운 하나님’을 연주했다. 이 곡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한 유대인의 기도문이 바탕으로,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축하만 할 수 없는 20주년
이번 평창대관령음악제는 다음달 5일까지 11일 동안 열린다. 세계적 콩쿠르에서 우승한 젊은 클래식 스타들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를 비롯해 지난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첼리스트 최하영과 도쿄 비올라 콩쿠르 우승자 비올리스트 박하양, 올해 모차르트 콩쿠르에서 우승한 현악사중주단 아레테 콰르텟 등의 공연이 이어진다. 최하영은 폐막 공연에서 제네바 콩쿠르 우승자인 일본 첼리스트 우에노 미치아키와 함께 브람스 첼로 협주곡을 나눠 연주한다.
28일 영국 왕립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로더릭 채드윅이 연주한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29일 스페인 기타리스트 호세 마리아 가야르도 델 레이와 양인모의 협연, 키이우 비르투오지가 아시아 초연한 바루크 벌리너의 ‘야곱의 꿈’ 등이 큰 박수를 받았다. 강원 지역민이 쉽게 들을 수 있도록 시·군에서 공연하는 ‘찾아가는 음악회’에 더해, 무성영화 상영회에 즉흥 라이브 연주를 펼치는 ‘찾아가는 가족음악회’를 올해 처음 선보였다.
역사적인 20주년을 맞았지만 축포만 터뜨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김진태 강원지사가 지난해 7월 취임한 이후 강원도가 문화행사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올해 평창대관령음악제도 축소를 피할 수 없었다. 3주에 걸쳐 역대 최대 음악제가 열렸던 지난해에 대비된다. 예술감독을 맡아 음악제를 5차례 성공적으로 이끈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지난해 12월 갑자기 사임한 배경이 아니냐는 뒷말도 나온다.
26일 개막공연 객석에는 김진태 지사가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심재국 평창군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양성원 예술감독은 무대 인사를 하면서 “음악제를 후원해주셨던 분들께 지속적인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 지사를 겨냥한 발언은 아니었겠지만 무척 간곡하게 들렸다. 기자를 태운 택시기사는 “저도 ‘찾아가는 음악회’ 덕분에 나이 오십 넘어 클래식의 멋있는 매력을 알게 됐다”며 “(코로나19 엔데믹으로) 해외여행이 풀려서인지 지난해에 비해 음악제 손님이 많이 줄어 씁쓸하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박진영씨(39)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평창대관령음악제를 찾았다. 박씨는 “자연이 주제인 만큼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면서 환경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도 알려주고 싶었다”며 “연주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을 연주해 좋았다”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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