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계일주’는 지상파 예능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OTT 같은 뉴미디어가 점점 더 영향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레거시 미디어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특히 한때는 예능의 중심이었던 지상파가 이제는 유튜브 같은 채널에 주도권을 빼앗긴 채 변방으로 밀리는 상황이다. 지상파는 새로운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김태호 PD마저 지상파 예능 떠나
《일밤》부터 《무한도전》에 이르기까지 한때 MBC는 누가 뭐래도 자타 공인 예능의 맹주였다. 쌀집아저씨 김영희 PD부터 《무한도전》 김태호 PD까지, 이들이 시도한 도전들은 사실상 예능 전체의 트렌드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무한도전》은 레전드였다. 이 갈래에서 뻗어나온 KBS 《1박2일》 같은 여행 예능은 물론이고 캐릭터쇼, 상황극, 토크쇼, 리얼리티쇼 등등 거의 10년 가까운 시기의 예능 트렌드를 이 프로그램이 선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권좌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티빙 같은 OTT들이 새로운 플랫폼으로 등장하면서 서서히 무너졌다. 그래도 끝까지 MBC에서 버텨냈던 김태호 PD마저 작년 MBC를 떠나 독립한 건 그래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처럼 여겨졌다.
이건 KBS나 SBS 같은 여타 지상파는 물론이고 tvN, JTBC 같은 케이블과 종편에서 힘을 발휘하던 채널들도 마찬가지였다. KBS 《개그콘서트》가 폐지되고 개그맨들이 대거 유튜브로 옮겨와 '피식대학' 같은 코미디 채널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사실이나, 나영석 PD가 tvN 소속으로 있다가 최근 에그이즈커밍이라는 예능 제작사로 옮겨간 사실도 이런 흐름을 말해 준다. 이른바 지상파(를 포함한 레거시 미디어) 예능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렇게 된 건 이제 레거시 미디어의 플랫폼에 얽매여 시청률의 잣대에 좌우되는 기획을 하는 것이 더는 달라진 대중의 취향을 맞추기 어려워져서다. 지상파를 위시한 레거시 미디어들이 지표로 내세우는 시청률이란, 이른바 '보편적 시청자'를 겨냥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취향을 담기보다는 전 연령대의 시청자가 두루두루 좋아하는 걸 담아 시청률 수치를 높이는 것이 이들 예능의 특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적으로 원하는 시간에 보는 '취향의 시대'다. 확실하게 취향을 저격하는 뾰족한 프로그램이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프로그램이 돼버린다. 그러니 레거시 미디어에 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연출자들은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그 누구보다 트렌드 변화에 민감하게 움직여야 하는 예능 PD들은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레거시 미디어를 벗어나 스튜디오 제작사로 옮기고 싶어 한다.
김태호 PD가 MBC를 나와 차린 테오라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프로그램들을 보면 한마디로 다양하다. 《지구마블 세계여행》 같은 여행 크리에이터들이 세계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댄스가수 유랑단》처럼 MBC 《놀면 뭐하니?》의 한 지류에서 흘러나온 다분히 레거시 미디어적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도 있다. 아마도 MBC에 소속돼 있다면 이러한 다양한 시도는 어려울 것이다. 나영석 PD도 마찬가지다. 에그이즈커밍으로 소속을 옮긴 후 그는 《뿅뽕 지구오락실》이나 《서진이네》 같은 전형적인 tvN표 게임, 여행 예능을 하면서도 《출장십오야》 《나영석의 나불나불》, 나아가 라이브 방송까지 하고 있다. 다양한 플랫폼에 맞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이 스튜디오로 옮겨가는 중요한 이유다.
굳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한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주력 미디어가 바뀐다는 건 단지 형식만이 아닌 내용까지도 바뀐다는 의미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가 주력 미디어로 자리하면서, 스타 유튜버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이것은 과거 레거시 미디어의 주역이 연예인이었지만, 유튜브의 주역은 인플루언서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레거시 미디어들 역시 이 새로운 주역들을 방송으로 끌어오기 시작했다.
《뿅뿅 지구오락실》이 큰 화제가 된 건 여기 출연한 영지, 이은지, 미미, 안유진이 연예인이면서도 저마다 SNS에서 막강한 인플루언서들이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tvN에서 방영되지만, 유튜브 같은 자유롭고 진심이 담기는 SNS의 색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김태호 PD가 《지구마블 세계여행》으로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 같은 스타 여행 유튜버들을 출연자로 세운 것도 이런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어서다. 최근 주목되고 있는 MBC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도 마찬가지다. 기안84는 물론 《나혼자 산다》를 통해 인기를 끌었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보다 유튜버에 가까운 날것의 여행을 선보이고 있고, 여기에 빠니보틀에 이어 시즌2에서는 덱스까지 합류했다.
특히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가 주목받는 건, 이 프로그램이 MBC라는 지상파 예능이면서도 최근 웹예능의 트렌드를 상당 부분 따르면서 괜찮은 시청률과 화제성까지 모두 확보하고 있어 위기의 지상파 예능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서다. 여행 예능이라는 지상파에 익숙한 소재를 가져왔지만, 출연자는 빠니보틀이나 덱스 또 기안84 같은 유튜버거나 유튜버에 가까운 인물로 구성하고 또 여행지도 남미 아마존 정글이나 인도 같은 지금껏 지상파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곳을 선택해 보다 날것의 여행을 담아낸 점 등이 웹예능의 트렌드를 따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최근 《나혼자 산다》 역시 김대호 아나운서 같은 남다른 '야생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출연자를 통해 1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전현무가 '트민남(트렌드에 민감한 남자)' 같은 캐릭터를 내세워 최근 트렌드를 따라잡는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 등으로 웹예능이 가진 특징들을 담기 시작한 《나 혼자 산다》는 지상파 같은 레거시 미디어도 현 트렌드에 맞는 변화를 통해 시청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취향의 시대…새롭고 진정성 있는 시도 필요
최근 들어 지상파 같은 레거시 미디어들의 예능은 남은 게 연예인 관찰카메라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새로운 기획이나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구성으로 관찰카메라를 세워둔 후 거기 나오는 이야기들을 편집해 담는 연예인들의 일상 리얼리티밖에 시도할 게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다. 물론 관찰카메라는 이제 어디에서든 활용되는 촬영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위에 얹어지는 참신하면서도 진정성이 엿보이는 시도들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레거시 미디어라서 못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때의 방식에 머물러 있는 게 문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놀면 뭐하니?》다. 김태호 PD가 있을 때 이른바 '부캐'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유재석의 1인 크리에이터 같은 도전이 주목을 끌었던 이 프로그램은, 그가 빠지자 과거 《무한도전》 시절의 향수로 퇴행해 버렸다. 최근 들어 PD가 교체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역시 중요해지는 건 SNS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성'을 얼마나 깊이 있게 보여주느냐가 아닐까 싶다.
물론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가 정답일 수는 없다. 다만 이 변화 속에서 과거에 머물러 옛 시청자들의 추억에 기대는 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 될 거라는 점이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시도, 새로운 진정성을 착장하는 것에서부터, 지상파 같은 레거시 미디어들이 마주한 위기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거기에 해답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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