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왜 도서관에서 없애란 거죠?”…‘금서’ 찾아 읽는 사람들
150종 이상 성평등·성교육 책 폐기 민원
인권 활동가들, 해당 도서들 책담회 열어
“평등의 필독서” “아이들에 위안 되는 책”
줄리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침대에 올라가거나 계단 난간을 타는 여자아이다. 목욕하는 것은 싫어한다. <줄리의 그림자>(이마주)는 ‘선머슴’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줄리가 어느 날 ‘남자아이’의 그림자를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책이다. 1975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숨길 수 없는 그림자에 낙심하기도, 그림자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기도 한 줄리가 “나는 나다울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 담겼다.
“그림이 아주 아름답고, 줄리의 고민에 공감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이 왜 도서관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거죠?”
지난 19일 오후.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충남차제연)이 연 ‘제3차 릴레이 성평등 책담회’에서 유내영씨가 물었다. 최근 충남 일대 도서관에는 성평등·성교육을 주제로 한 어린이책을 폐기 처분해달라는 보수 성향 학부모단체들의 민원이 쇄도했다. <줄리의 그림자>도 이 단체들이 “아이들에게 유해하다”며 만든 150종이 넘는 ‘문제도서’ 목록에 포함돼 있다.
충남 지역 인권·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문제도서’를 되려 찾아 읽고 의견 나누는 책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충남차제연 관계자는 “혐오에 반대하는 책이라면 오히려 평등의 필독서가 아닐까”하는 호기심에서 책담회를 기획했다고 했다.
이날 9명의 활동가 및 시민들이 나눠 읽은 책은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다학연)’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성정체성 혼란과 에이즈 증가, 가족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책들”로 꼽은 4권이다. <줄리의 그림자>, <우리 가족은 행복해요>(내인생의책), <생각이 크는 인문학1 성평등>(을파소), <외계인소녀 원시인소년>(파란자전거)가 그것이다.
책들을 꼼꼼히 살피며 대화를 나눈 활동가들은 “처음엔 다학연의 논리를 어떻게 반박할지 생각하려 했는데, 고민할 필요 없이 좋은 책들이었다”며 “나다움·다양성을 얘기하는 게 좋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책 <우리가족은 행복해요>는 “행복하게 살면 다 가족”이라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보여준다. 책에는 “엄마가 둘이라니 부러워!”라는 문장이나 아빠 두 명이 아이를 행복하게 바라보는 삽화가 있다. <외계인소녀 원시인소년>에는 “자라다 보면 어떤 남자아이들은 다른 남자를, 어떤 여자아이들은 다른 여자를 좋아하기도 해요. 고민하지 마세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라는 문장이 나온다.
호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는 “소설 주인공으로 성소수자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아동들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 정체성을 탐색하는 아동·청소년들에게는 위안이 되겠다”며 “성인기에 읽는 데도 위로가 많이 됐다”고 했다.
이어 “아이들이 성소수자를 학습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어? 이런 책이 있네?’ 하고 읽다 보니 등장인물이 성소수자인 것이고, 그러다가 등장인물에 공감하게 되는, 다양성을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계기들이 사회적으로 많아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이들은 일부 단체들이 이 책들을 왜 문제시하는지도 토론했다. 이진숙 활동가는 “이러한 책을 서가에서 빼라는 건, 아동·청소년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아서인 것 같다”며 “정상가족의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고 했다. 고나영씨는 “어떤 이유에서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빼라는 게 말이 되나. 책을 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생각”이라고 했다.
충남차제연은 오는 2일에도 온라인 책담회를 이어간다. <10대를 위한 빨간책>(레디앙), <걸스토크>(시공주니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담푸스), <우리 가족 인권 선언>(노란돼지) 등 포괄적 성교육 도서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지난 25일 지민규 도의원이 충남도의회 긴급현안 질문에서 “아이가 있다면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문제삼았던 책들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38522?ntype=RANKING&type=journalists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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