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청계천 편을 기억하시나요.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을 흐르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한양도성의 권역이 나누어졌습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위는 북촌, 아래는 남촌으로 불렸습니다. 물이 흐르는 구간을 따라 상류는 상촌, 중류는 중촌, 하류는 하촌으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개천이 나누는 지역에 따라 생활권이 구분되고 거주민들이나 상권의 특징이 달랐습니다. 오늘은 ‘북촌과 남촌’, 그중에서도 ‘남촌’의 변화사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권세가가 모인 북촌, 몰락양반의 거주지 남촌
조선시대 ‘북촌과 남촌’이라는 말은 주로 붕당세력의 거주지를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종각 이북 지역인 북촌에는 노론이 살았고, 남촌에는 소론과 남인 등이 섞여 살았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노론은 조선말 세도정치시기인 18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세력입니다. 권세 있고 벼슬 높은 관리가 다수였던 노론 세력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과 가까운 북촌에 거주했습니다.
반대로 남촌은 어땠을까요. 몰락한 양반 허생의 일대기를 다룬 박지원의 <허생전>은 ‘허생은 묵적골 오막살이에 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묵적골이 남산 아래 남촌 일대의 마을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읍의 제도에 귀한 사람은 북쪽에 살고 천한 사람은 남쪽에 산다.’ 이렇게 궁과 멀찍하게 떨어진 남촌에는 하급 관리나 몰락한 양반 가문,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정착지
북촌과 남촌의 위상이 뒤바뀌는 일대의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제의 국권 침탈이었습니다. 1885년, 한양 내 일본인 거주가 허용되면서 일본인들의 이주가 물밀 듯 시작됩니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정부가 지정한 거류지였던 남촌의 진고개 근처에 모여 살았습니다. 지금의 충무로, 필동, 남산동, 예장동, 회현동, 명동 일대에 해당합니다. 이듬해인 1886년 진고개의 거주민은 1년 사이 두 배 이상 급증한 1839명(500호)였고, 1906년에는 1만 명,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는 3만 44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중구청에서 명보극장, 충무로로 인쇄거리를 거쳐서 세종호텔, 서울중앙우체국에 이르는 진고개길은 지형이 낮고 폭우가 오면 남산에서 쓸려온 토사로 땅이 질어 사람이 살기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값이 쌌고, 외지인이 정착하기에 좋았습니다. 또한 이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마시타나가모리와 일본군 1500여명이 ‘왜성대’라는 성을 쌓고 주둔했던 터라는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상징성이 큰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찍이 이곳엔 일본 공사관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한양을 경성부로 개칭합니다. 그간 한양의 중심이 궁궐이 있는 북촌이었다면, 경성의 핵심이 되는 지역은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남촌이었습니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경성 인구의 14%를 차지했는데, 이들 대다수가 남촌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남촌의 변화는 도로의 정비와 포장으로 나타납니다. 1911년 황금정(을지로)과 1912년 태평통(태평로)가 연이어 개통합니다. 지금의 남대문로에 해당하는 남대문통에는 일본영사관, 거류민 총대역장, 경성우편국, 조선은행 등 주요 기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한편 진고개길에는 거대한 상업지구가 생겼습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일본어로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혼마치(본정통)’로 불렀습니다. 화려한 조명이 불을 밝히고 상점마다 일본어 간판이 달려 있던 이곳은 마치 긴자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고 합니다. ‘경성의 긴자’로 불리기도 했던 혼마치는 최고급 소비 상권으로 번성했습니다. 혼마치의 초입, 남대문통과 만나는 곳에는 선은전 광장이 들어섰습니다.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으로 둘러싸인 이 광장은 식민지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발전 더딘 북촌, 남촌과 뒤바뀐 위상
북촌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북촌 거리에 이와 같은 발전은 없었습니다. 당시 한글 신문 및 잡지에서는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남촌 시가, 몰락한 북촌의 참상’과 같은 방식으로 두 지역을 비교했다고 합니다. 북촌 거주민들은 남촌에 비해 뒤떨어진 사회 제반시설들을 확충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대부분 일제에 의해 묵살되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식민 통치가 지속되며 조선 내의 일본인들의 정치·경제적 지위가 커지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이들의 주 활동지인 남촌은 점차 규모를 확장합니다. 그동안 북촌과 남촌으로 구분되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세력이 규모를 넓혀 가며 두 구역 간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20년 전 흥행했던 드라마 ‘야인시대’를 기억하시나요. 드라마인 만큼 상당한 각색이 있지만, 주인공 김두한이 주축이 되었던 한국인 세력(북촌)과 하야시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 세력(남촌)의 패권 다툼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극중 하야시는 혼마치를 건설한 야쿠자라는 설정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북촌의 중심인 종로 일대에서 조선 상인들은 서로 연합하며 일본인들로부터 상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북촌과 남촌’은 조선인 거주 구역인 북촌과 일본인 거주 구역인 남촌으로, 민족 간의 거주지에 따라 공간이 구분됩니다. 남촌은 이제 더 이상 외지인들의 거주공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남촌은 지배세력이 식민지 조선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적 공간이었고, 반대로 북촌은 몰락한 조선의 왕가와 피지배층들이 잔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참고문헌>
ㅇ정수진, 「서울의 인문학」, 창비
ㅇ김기호,「서울 남촌 : 시간,장소,사람」, 서울시 간행물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