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씨가 호남에 가져야 할 연민과 책임 [노원명 에세이]
“자네들이 공기처럼 들이마시며 그 속에 묻혀서 살고 있는 것이 뭐였지? 오십 년 전에 일어났다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갖가지 사건에 대한 망령과도 같은 억누를 수 없는 노여움과 긍지와 영광 따위로 가득한 일종의 진공과도 같은 것인가? 셔먼 장군에 대한 원한을 끝내 버릴 줄 모르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또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대로 이어지는 일종의 타고난 권리라고나 할까? (중략)”
“(중략) 너는 이해할 수가 없어. 남부에서 태어나야만 알 수 있는 일이야.”
남북전쟁이 끝난 지 약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하버드대학교 기숙사 룸메이트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다. 묻는 쪽은 캐나다, 답하는 쪽은 미시시피 출신이다.
한국의 평균적 비호남인들과 평균적 호남인들 사이에도 이런 대화가 오갈법 하다. 비호남인들은 호남인들에게 40년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언제까지 진공속의 분노와 긍지, 영광을 말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 호남인들은 ‘광주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모른다’고 대답한다.
물론 미국 남부와 호남은 다르다. 남부는 시대착오적 문명을 대변하다 진 패배자의 원한과 긍지일 뿐이고 호남은 독재에 맞서 싸운 궁극적 승리자로서의 긍지로 가득하다. 그 긍지에 대해 평균적 비호남인들이 특별히 불편해야 할 까닭도 없다.
이 시점에서 호남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관찰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긍지 이상으로 분노와 피해의식에 여전히 지배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적 연민을 넘어 정치적 문제의식으로 이어질 때가 있는데 그 진공 상태의 긍지와 분노에서 발원하는 한국 정치의 모순과 마주할 때다.
80년 이후 많은 호남인들이 대한민국 주류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을 증오하면서 그 세력이 계승했다고 여겨지는 가치들, 예컨대 박정희·이승만의 유산, 1948년 건국 자체에 대한 반발심이 싹텄다고 여겨진다.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은 건국 이래 존재했다. 그것은 지역보다는 엘리트 계급 간 권력 투쟁의 문제였지만 80년 사건을 거치면서 지역 문제로 전환했고 호남은 이후 ‘대안 대한민국 세력’의 거점이 되어왔다.
내가 호남에 갖는 문제의식은 그들의 역사관이나 정치의식의 당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바르셀로나가 마드리드와 다른 정체성에 기반하듯 지금 호남도 그렇다. 여기서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실이 그럴 뿐이다. 다만 80년 이후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된 호남의 정치적 팔로어십(followership)이 근래에 와서 나쁜 리더십에 의해 착취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좀 나쁘다.
DJ 이후에 호남에 진정한 의미의 정치 리더십이 존재하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호남은 DJ 이후 노무현을 거쳐 문재인, 지금은 이재명 민주당의 정치적 텃밭이 되어왔다. 노무현은 DJ당의 대선후보였으니 그렇다 치고 문재인과 이재명은 호남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들도 DJ의 계승자인가. DJ와 문재인, 이재명 사이에 무슨 친연성이 있나.
호남이 이재명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재명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대한민국 주류세력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노무현, 문재인도 그랬다. 호남인이 진정 사랑해서 지지한 마지막 지도자는 DJ였다.
호남의 불행은 첫째가 80년 이후 대한민국 주류를 증오하도록 틀지어졌다는 것이고(결코 호남의 책임이 아니다) 두 번째 그들의 분노를 자양분 삼는 반주류 정치 세력이 갈수록 저질화한다는데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호남의 책임이다. 버릇이 나쁜 아이의 책임은 부모가 지는 것이다.
지난 29일 저녁 이재명 대표와 만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뼈있는 말을 많이 했다. 그는 총선 승리와 당의 단합을 강조하는 이재명 대표에게 민주당의 혁신과 도덕성,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그 보도를 보면서 호남 출신인 이낙연 전 대표가 호남에 대해 연민과 책임감을 더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그보다 타락한 괴물이 나와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호남인의 운명은 얼마나 비참한가. 왜 호남은 더 정상적이고 책임 있는 리더십을 가져서는 안 되나. 호남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혜택을 입고 살아 온 이낙연씨는 그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부산 가느니 그만두겠다”…산업은행 ‘통째이전’ 결정에 퇴사 잇달아 - 매일경제
- “냄새나면 문닫아”…아랫층 흡연男 ‘전동 안마건’으로 응징 - 매일경제
- 백종원도 강력 경고했다…여름철 ‘이것’ 만지면 귀찮더라도 바로 손씻어라 - 매일경제
- ‘국민 안마의자’에 무슨 일?…경영권 분쟁에 노조 첫파업까지 - 매일경제
- 이것 10% 뛰면 아파트 분양가 껑충 뛴다고?...레미콘업계 펄쩍 - 매일경제
- 코로나 끝난 줄 알았는데…일평균 4.7만명 넘으며 재유행 우려 - 매일경제
- 욕탕에 발가벗고 들어가는 한국...세계가 손꼽는 ‘화끈한 나라’ 1위 - 매일경제
- 일본서 대박 난 루이비통…엔저에 중국인들 ‘싹쓸이’ - 매일경제
- “도로 전세 냈나”…적재물로 2개 차로 모두 막고 달린 화물차 - 매일경제
- 사우디 정부, 메시-호날두 이어 퓨리-은가누도 성사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