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쇼헤이 같은 ‘강타자 투수’는 왜 드물어졌을까? [경기장의 안과 밖]
오타니 쇼헤이의 2023년은 엄청나다.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투타 양면에서 맹활약하며 MVP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정규시즌에도 활약은 이어졌다. 전반기를 마친 현재 타자로 타율 0.302에 32홈런, OPS(출루율+장타율) 1.050을 기록했다. 홈런과 OPS는 아메리칸리그(AL) 1위다. 투수로는 평균자책점 3.32(13위)에 9이닝당 삼진 11.84개(2위)다.
선수의 활약을 승수로 환산하는 fWAR(대체 선수 대비 승수, 팬그래프 집계)에서 타자로 4.3승, 투수로 1.7승을 거뒀다. 산술적으로 시즌 종료 시점에서 fWAR 10.68승을 거둘 수 있다. 2022년 프리에이전트(FA) 시장에서 fWAR 1승은 대략 850만 달러 가치였다. 이를 적용하면 오타니의 올해 적정 연봉은 9080만 달러(약 1175억원)로 실제 연봉(3000만 달러)의 세 배가 넘는다.
올해 메이저리그 투수 최고 연봉은 뉴욕 메츠의 사이영상 콤비 맥스 슈어저와 저스틴 벌랜더로 똑같이 4333만 달러(약 561억원)다. 야수 최고 연봉은 뉴욕 양키스 강타자 애런 저지의 4000만 달러다. 오타니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FA 시장에 나온다. 오타니의 에이전트라면 “투수와 야수로 각각 최고 수준 대우를 해달라”고 주장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벌써부터 “10년 7억 달러 계약도 싸다”는 말이 나온다.
오타니는 지금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다. 한 메이저리그 선수는 지난해 시즌 뒤 “투타를 겸업하는 오타니가 MVP 경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공평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타니의 가치가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하게 타자와 투수 모두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치는 데서 나온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왜 오타니뿐일까.
투수가 타격에 약하다는 것은 야구 상식이다. 그런데 여러 포지션 가운데 투수가 체격 조건이 가장 좋다. 운동능력이 좋을 가능성이 크고 강타자가 될 확률도 높을 것이다. 한국 고교야구는 2004년부터 지명타자(DH) 제도를 도입했다. 그 이전에는 ‘강타자 투수’가 드물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통산 1671안타를 때린 추신수(현 SSG)는 부산고 시절 투수로도 에이스였다.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통산 626홈런을 때린 이승엽은 1995년 삼성에 왼손 투수로 입단했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일본 고교야구에서는 지금도 투수가 4번 타자를 맡는 팀이 많다. 오타니도 고교 시절 그랬다. 미국 대학야구에는 ‘존 올러루드 상’이 있다. 가장 뛰어난 투타 겸업 선수에게 주는 상이다. 올러루드는 워싱턴 주립대학 2학년이던 1988년, 타자로 66경기에서 타율 0.464에 23홈런, 투수로 15승 무패 평균자책점 2.49를 기록했다.
투수 대신 타석에 들어서는 DH 제도는 1973년 메이저리그에 처음 도입됐다. 야구가 탄생한 19세기부터 그 이전까지는 당연히 투수도 타격을 했다. 초창기 야구에는 ‘기록상으로’ 오타니보다 더 위대한 투타 겸업 선수가 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앨 스팰딩은 1871년 창설된 최초의 메이저리그인 내셔널어소시에이션(NA) 원년 멤버였다. 스팰딩은 통산 8시즌 동안 251승에 평균자책점 2.13을 기록한 최고 스타였다. 아울러 타자로도 통산 타율 0.313에 613안타를 기록했다. NA의 후신인 내셔널리그(NL)에서 1880년대 뛰었던 가이 헤커는 투수로 173승, 타자로 812안타를 일궈냈다.
투구가 점점 전문화되면서 겸업 줄어
스팰딩과 헤커 같은 강타자 투수는 이후 무척 드물어졌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1000타석 이상 기준 OPS 0.800 이상을 기록한 투수는 고작 2명, 0.700 이상도 15명뿐이다. 왜 그럴까. 야구 규칙의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스팰딩이 고작 7시즌(실질적으로 6시즌) 동안 251승을 따냈다. 현대 야구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1871년 소속 팀 보스턴은 무승부 포함 71경기를 치렀다. 스팰딩은 69경기에 선발, 2경기에 구원으로 등판해 617과 3분의 1이닝을 던졌다. 당시 투포수 간 거리는 13.64m로 지금(18.18m)보다 훨씬 짧았다. 오버핸드 투구가 금지돼 어깨에 무리도 적었다. 그래서 이런 이닝수 등판이 가능했다.
초창기 야구에서 투수의 역할은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투구는 테니스나 배구의 서브와 비슷했다. 타자는 투수에게 원하는 공을 주문할 수 있었다. 스윙을 하지 않은 공과 파울은 스트라이크로 치지 않았다. 하지만 잇따른 규칙 개정으로 투구는 점점 전문화되었다. 투구의 목적도 타자를 아웃시키는 쪽으로 변화했다. 투수들은 오버핸드 투구폼으로 강속구를 던지기 시작했고, 다양한 변화구를 개발했다. 투구가 고급 기술이 되자 19세기처럼 한 투수가 팀 이닝을 도맡는 상황은 불가능해졌다. 여러 투수가 번갈아 선발 등판하는 로테이션 개념이 등장했고, 이후엔 구원투수진, 즉 불펜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에 따라 투수 한 명이 들어서는 타석 수는 야수에 비해 매우 줄어들었다.
투수가 시즌 30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타자 30명을 평균적으로 상대하고 4타석에 타자로 들어선다고 하자. 그렇다면 한 시즌 투수로 900타석을 책임지고 타자로 120타석에 나선다. 아무리 타격에 재능이 있는 투수라도 어느 쪽에 집중하는 게 나은지는 명백하다. 1950~1960년대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샌디 코팩스와 황금 듀오를 이룬 돈 드라이스데일은 ‘강타자 투수’로 유명했다. 그는 1965년 138타석에서 타율 3할에 7홈런, OPS 0.839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산 OPS는 0.523에 불과했다. 투수에 집중하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투타를 겸업하면 부상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오타니의 롤모델이다. 루스는 1918~1919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투수와 외야수를 겸했다. 투수로 22승을 따냈고 타자로는 2년 연속 홈런왕이 되었다. 하지만 1920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에는 타격에 전념했다. 루스가 타격에 더 매력을 느끼기도 했지만 투구에 따른 부상 우려가 컸다. 루스는 구단에 타자 전향을 요청하지만 거부되었고, 대신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날 외야수로 뛰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칼 바겐하임이 쓴 루스의 전기에 나온 설명이다. 그만큼 투타 겸업은 난도가 높다. 오타니의 일본 시절 소속 팀 니혼햄 파이터스 투수코치였던 요시이 마사토는 “같은 야구를 하지만 투수와 야수는 공을 던지는 방법부터 다르다”라고 말했다.
김성한 전 KIA 감독은 1982년 KBO리그 원년에 투수로 10승, 타자로 타율 3할을 기록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투타 겸업으로 유의미한 성적을 낸 유일한 인물이다. 겸업은 사실상 1년으로 끝났다. 김 전 감독은 “역시 부상 문제가 컸다. 나는 대학 시절 팔꿈치를 다쳐 투수로는 오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 그래서 김동엽 당시 감독이 입단 때부터 ‘투수에 전념하라’고 했지만 타격 훈련을 꾸준히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런 만큼 오타니의 투타 겸업이 언제까지 성공을 거둘지에는 늘 의문부호가 따라붙는다. 이미 오타니는 메이저리그 진출 뒤 한 차례씩 팔꿈치와 무릎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오타니는 2013년 프로야구 선수가 된 뒤로 줄곧 부정적인 시선과 싸우고 극복해왔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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