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때도 이어진 남북대화 ‘뚝’…“평화가 밥”인데
전, 경제 살리려 관계 개선 시도
특사 파견·친서 교환 등 노력
핵잠 올라탄 윤 대통령, 강경책만
원로 종교인들 “대화의 문 열어야”
지난 20일 저녁 국회 의원회관에서 ‘1기 민주주의자 김근태 학교’ 마지막 강의와 수료식이 열렸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우원식 의원과 이인영 의원이 강연했습니다.
이인영 의원은 문재인 정부 마지막 통일부 장관이었습니다. “평화가 밥이다” “평화가 경제다”라고 했던 김근태 전 의원의 ‘평화경제론’을 소개하며, 자신이 통일부 장관 시절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국외 신용평가기관이 신용평가를 할 때는 통일부에 남북관계를 꼭 물어보더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평소 업무 관련성이 별로 없는 경제부총리한테 “말을 좀 잘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1985년 북한과 특사단을 교환하며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섰던 이유가 바로 경제 때문이었음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특사단으로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던 박철언 전 의원에게 물었더니, 전두환 대통령이 ‘경제를 위해 북한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상회담 성사 ‘88 계획’
전두환 정권 당시의 정세와 역사가 궁금했습니다. 2017년 출판된 ‘전두환 회고록’을 찾아보았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처음부터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자화자찬이 많아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공식 기록은 참고할 만한 내용이 꽤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은 1981년 1월 국정 연설에서 남북 당국 최고 책임자 상호 방문을 제의했습니다. 1982년 국정 연설에서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평화통일을 위한 구체적 방안과 통일 전까지 필요한 남북한 기본관계 협정을 담은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983년 1월 국정 연설에서도 최고 책임자 회담 개최를 거듭 촉구했습니다.
그 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숨졌습니다.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1984년 9월 서울·경기 지방에 큰 수해가 났습니다. 북한은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전 대통령은 수락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남북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체육회담이 열렸습니다. 1985년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전 대통령은 1985년 개각에서 장세동 경호실장을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라는 임무를 주고 ‘88 계획’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북 당국자 비밀 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습니다.
1985년 9월 허담 특사(노동당 중앙당 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한시해 수석대표(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안병수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과장(조평통 부위원장 겸 서기국장) 등이 내려와 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1985년 10월 장세동 특사(안기부장), 박철언 수석대표(안기부장 특별보좌관) 등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했습니다. 전 대통령은 김 주석에게 친서를 보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며 실천 가능한 사항에 합의를 이루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정상회담 의제는 불가침 선언과 그 제도적 보장 장치로서 교차 수교가 필요하다. 평화통일을 위한 기본 원칙으로 민족자결, 남북 당사자 간의 합의, 평화적 방법이 필요하다.”
전 대통령은 자신이 먼저 평양을 방문하고 그 뒤에는 김 주석이 서울을 방문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장세동 특사의 방북 직후 간첩선 침투 사건을 이유로 정상회담 추진을 갑자기 중단시켰습니다. 정말로 간첩선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것인지, 처음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궁금한 대목입니다.
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위해
그래도 특사들의 대화 창구를 닫지는 않았습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남북 간 대화는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 대통령은 ‘86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유럽을 순방하면서 한반도 전쟁 방지와 평화 정착을 위한 안전장치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미·일·중·소 4강의 남북한 교차 수교를 위한 외교적 협력’에 대한 유럽 정상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전 대통령의 구상 가운데 상당 부분이 노태우 대통령 때 실현됐습니다.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힌 1985년의 남북 접촉 상황은 박철언 전 의원이 2005년에 출판한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과 거의 일치합니다. 박 전 의원은 꼼꼼한 기록과 사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전 대통령이 북한의 허담 특사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우선 전 대통령은 허담 특사가 낭독한 ‘김 주석의 견해’의 내용은 그 하나하나가 자신의 생각과 거의 동일하다면서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설명했다. 첫째, 긴장 완화와 동족 간의 전쟁 억지, 둘째, 남북 간의 신뢰 회복, 그리고 셋째, 국제사회에서의 과당 경쟁 지양 등의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하고 싶다며, 그러나 의제를 내놓고 하는 것보다는 남북 간의 공동 관심사를 비롯하여 남북한 주변 정세를 포함해 국제 정세에 대한 충분한 상호 의견 교환이 진정한 정상회담의 의의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전 대통령은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군 출신답게 정확한 수치를 인용해 남북한의 군사력과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군사 배치 상황을 세세히 열거해 가면서 ‘어떤 이유에서든 남북한 간의 전쟁은 강대국의 개입을 불러오고, 이로 인해 남북한은 모두 풀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며 민족의 멸망은 불을 보듯 하다’면서 전쟁 억지는 남북 지도자의 소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떻습니까? 쿠데타로 집권해 철권통치를 폈던 전 대통령이 북한과 김일성 주석에 대해 이처럼 포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강경 일변도 대북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무척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윤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핵 위협에 강하게 대응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남북대화나 남북 교류는 머릿속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북한을 무릎 꿇리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 엿보입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워싱턴 선언으로 핵협의그룹을 창설했습니다. 7월에는 부산에 입항한 전략핵잠수함 켄터키함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대북 강경 정책은 바이든 행정부의 북한 무시 정책, 미-중 갈등과 맞물리며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공포의 평화’, 근본 해결책 아니야”
북한도 점점 더 강경해지고 있습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중국과 러시아 고위 사절들을 초청해 ‘전승절’을 기념했습니다.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 조짐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한반도에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이 갈수록 점점 더 첨예해지는 양상입니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과 갈등은 군사적 긴장을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커집니다. 자칫하면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이런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원로 종교인 33명이 나섰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 정전 70주년을 하루 앞둔 7월26일 평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의 원인을 짚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곡진하게 담았습니다. 원로 종교인들이 누구인지, 어떤 내용을 호소했는지 꼭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일부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북한의 핵 무력 고도화 시도는 한반도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나토식 핵 공유, 핵 확장 억제 정책, 한·미·일 군사동맹 등을 통한 대응만으로는 평화를 지켜내기에 부족하다. 남북 간의 핵 균형을 통한 ‘공포의 평화’는 만들 수 있으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북한에 핵무기를 더욱 고도화시킬 수 있는 빌미를 주어 핵 공포의 악순환과 우발적 충돌에 의한 전면적 핵전쟁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우리는 한반도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한반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된 북한 핵무기 확산을 신속히 동결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원로 종교인들은 “대한민국 역대 어느 정부도 대북 대화와 협상의 문을 아예 걸어 닫은 정부는 없었다”며 “한반도의 긴장을 풀 수 있는 더욱 과감한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윤 대통령이 원로 종교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반도 정책의 큰 틀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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