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제네시스 사줄게"…북파공작원 낀 강남 납치·살인 전말

CBS노컷뉴스 박희원 기자 2023. 7. 30.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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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강남 납치·살해' 사건을 사주한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 유상원(51)·황은희(49) 부부. 연합뉴스

지난 3월 대낮에, 그것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성인 여성을 납치해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전국민이 공포에 떨었습니다. 이들 일당은 피해자 권유로 코인 투자를 했다 실패한 부부의 사주를 받아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는데,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범행 계획을 들으면 그야말로 아연실색해집니다.

북파 공작원이었던 사실이 드러난 주범 이경우가 범죄 일당을 모집하며 약속한 대가는 제네시스 한 대와 1억원이었습니다. 이같은 제안을 받은 날 바로 범행에 가담한 일당. 이번주 법정B컷에서는 강남 납치·살인 사건의 공모 과정을 증언한 피고인 겸 증인의 진술을 전합니다.

살인 의도 없었다는데…처음 만난 그날 매장할 곳 찾아갔다?

지난 24일 증언에 나선 증인은 범행 직전 잠수를 탄 또 다른 이모씨입니다. 일단 살인 혐의는 면했고 강도예비로만 구속기소된 상태입니다. 그는 동네 형으로 알고 지낸 연지호를 통해 황대한을 소개받았고, 지난 1월 12일 대전에서 처음 접선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일당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요?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검찰: 2023년 1월부터 황대한과 연락하다 만나기로 했잖아요. 처음부터 말해보세요.

증인: 오랜만에 새해 안부차 연락드렸습니다. 대전에서 병원 진료 후 만나기로 해 만났습니다.

검찰: 황대한은 만나자고 할 때 뭐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하던가요?

증인: 뭐라 하면서 만나자는 건 아니었고, 병원진료 보고 나서 만나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검찰: 황대한과 연지호를 만난 자리에서 황대한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나요?

증인: 음… 코인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 코인을 뺏자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검찰: 황대한이 코인 뺏는거 제안할 때 승낙했어요?

증인: 그렇습니다.

검찰: 왜 승낙했어요?

증인: …그냥 하자고 해서 승낙했습니다. (※증인이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재판부가 빤히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검찰: 황대한은 피해자를 죽일 생각 없다고 주장하는데, 황대한이 증인한테 피해자 부부를 납치하고 죽인다고 얘기했나요?

증인: 정확히 죽일 거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검찰: 황대한한테 그런 제안받고 증인이 승낙했다고 했잖아요. 그 뒤로 어떻게 이동하고 어떤 일이 있었나요?

증인: 대청댐에 갔다가 흩어져서 다시 서울로 왔습니다.

검찰: 야산을 둘러보고 간 것 보면 피해자 최모씨를 암매장하려고 계획했던건 아닌가요?

증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검찰: 그러면 그날 저녁에 서울에 와서 뭐 했어요?

증인: 피해자 사무실에 도착해서 나오는 걸 기다리다 차량을 따라갔고 집에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검찰: 피해자를 납치한 다음에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증인: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계획은 없었습니다.

자, 증인을 범행에 끌어들인 공범 연지호는 지난 공판에서 살인 의도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씨도 처음 만난 날 살인 계획은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고 납치 후 계획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살인 혐의를 피하려는 전형적인 수법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강남 납치·살해 사건' 주범 이경우(36), 황대한(36), 연지호(30). 윤창원 기자


대청댐 탐방(?) 이틀 뒤 이씨는 드디어 주범 이경우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접선합니다. 네 명은 저녁을 함께 했고 이경우는 나머지 일당에게 "일을 마치고 난 뒤 굿을 예약해 놨다", "내가 입던 수백만원짜리 정장도 한 벌씩 사준다"고 약속했다네요. 그러곤 근처 모텔로 가 본격적으로 범행을 꾸미기 시작하는데요. 이날 밤에 대해 이씨는 법정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가며 그날 밤 모의를 한 건 맞지만, 본인은 시키는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점을 은연 중에 강조합니다.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검찰: 증인이 역삼동 숙소 내부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에 나온 것처럼 황대한이 식탁 맞은편, 연지호와 증인이 그 반대편에 앉아 서로 (범행에 대해) 얘기한 게 맞아요?

증인: 네.

검찰: 범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었다고 했는데 주로 누가 범행에 대해 설명했어요?

증인: 대한이형이 얘기해 줬어요.

검찰: 증인은 황대한, 연지호, 이경우와 함께 언제부터 언제까지 피해자를 미행했나요?

증인: 1월12일 처음 시작해서 3월18일까지 한 것 같습니다.

검찰: 피해자 최씨와 장씨 둘다 감시하고 미행한 거죠? 구체적으로 1월달엔 어떻게 피해자를 감시·미행했는지 말해볼 수 있을까요?

증인: 사무실 앞에서 주차하고 기다리다가 피해자가 나오면 그 뒤를 미행해 따라갔습니다.

정리하면 이씨는 1월12일 납치 범행을 제안받고 곧바로 승낙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형들을 데리고 대청댐과 야산으로 이동해 그 주변을 둘러봤고요. 그날 저녁 서울로 와서 피해자를 미행합니다. 이날부터 설날 당일을 빼고 3월18일까지 미행은 이어집니다. 피해자 부모가 사는 경기도 양평에도 답사를 갔고요.
지난 3월 29일 오후 11시 46분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40대 여성 A씨가 납치·살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연합뉴스


일당은 처음부터 살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처음 만난 그날 피해자를 암매장할 장소를 물색했고 미행을 시작했던 건 아닌지 강하게 의심이 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검찰이 공개한 연지호와 이씨의 통화 녹취록에는 "주사기를 새로 받아왔다", "다 포기하고 베트남으로 튈까", "죽이고나서 튀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대화는 이를 방증하고요.

납치 후 계획 없었다고? 땅에 파묻거나 대림동에 가거나

처음 만난 그날엔 살인까지 저지를 생각이 없었을지 몰라도, 이들 일당이 피해자를 아무 계획없이 납치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마치 범죄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구상을 했었거든요.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검찰: 연지호가 증인에게 '차 렌트 후에 대전으로 넘어가면 땅 파서 바로 하려(묻으려) 했거든'이라고 했잖아요. 이건 피해자를 납치해서 땅에 매장하려 한 건가요?

증인: 아뇨, 영화처럼 협박하려고.

검찰: 영화처럼 어디까지 묻으려 했나요?

증인: 그런 것은 모르겠습니다.

검찰: 묻은 다음에 피해자를 꺼내주려고 했나요?

증인: (저는) 범행을 실행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범죄 영화에 종종 나오는 바로 그 장면, 피해자로 하여금 땅을 파게 해 그곳에 묻을 것처럼 겁을 주려고 했다는 겁니다. 자신의 지시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입증하려는 의도였을까요, 이경우 측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물어봅니다.
'강남 납치·살해 사건' 주범 이경우. 윤창원 기자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이경우 측 변호인: 저도 이 부분이 좀 의문이었습니다. 피해자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연지호가 땅부터 팠나요? 협박을 이런 식으로 하자는 얘기들이 사전에 있었습니까? 지나가는 얘기로라도요.

증인: 기억 나지 않습니다.

변호인: 근데 정확히 언제, 어디, 누가 이런 부분은 생각 나지 않는다?

증인: 네

(중략)

변호인: 황대한이 역삼동 모텔에서 증인과 연지호에게 "피해자 부부를 납치하고 가방을 이경우한테 줘. 너흰 운전만 해. 중국인들, 대림동 장기적출 하는 곳까지 (피해자를)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은 황대한이 한 건가요, 연지호가 한 건가요?

증인: 잘 기억 안 나요.

변호인: 이런 사실이 없었다는 건가요, 기억 나지 않는 건가요?

증인: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변호인: 이경우가 사람을 납치해서 살인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으면 어떻게 살인할 것인지에 대한 진술이잖아요, 이 말은. 납치해서 가방을 어떻게 할 건지, 데려다가 대림동 장기 적출하는 곳까지 데려간다, 이런 건 범행 방법에서 중요한 건데요. 살인 계획에 대한 내용에 대해 증인이 기억 나지 않는 것은 그런 얘기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요?

증인: 제 역할은 운전하는 거라 그런 기억이 안 나요.

혹여 살인미수 혐의라도 적용될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한 공범과 그 공범의 기억에 의존해 살인 계획을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주범 측 변호인의 연극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당의 차에서 몽키스패너부터 청테이프 등이 발견된 걸 보면, 일단 납치만 하려 했다는 말은 쉽게 믿어지지 않거든요.

한국어도 모르는 증인…檢 "사정이 달라졌어요?"

나름대로 치밀하게 범행 계획을 세웠던 일당들. 하지만 법정에서 이씨는 수사 과정에서의 진술을 번복하거나 뻔히 알 만한 것도 '모른다'고 해 재판부의 질타와 방청객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결국 검사가 증인석 바로 옆에 서서 그의 진술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는데 직접 살펴보시죠.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검찰: 제가 탄핵증거 제시할게요. 증거목록 164번 1072쪽입니다. 피의자신문조서 맞죠? 본인이 권리 고지받고 다 읽어보고 '진술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확인하고 서명하고. 다 읽고 찍은 거죠?

증인: 그랬을 겁니다.

검찰: 1076쪽 보면 피의자가 황대한으로부터 살해하라는 지시 받았죠?  "누구를 납치해 살해 지시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예"라고, "누구냐"고 하니 "황대한"이라고 답했죠. "황대한에게 (범행을) 제의받은 일시와 장소를 말해보세요"라는 질문에, "2023년 1월 14일 1시에서 2시경 강남구 역삼동 모텔"이라고 본인이 대답했잖아요. 근데 왜 지금은 다르게 진술하는 거에요? 사정이 많이 바뀌었어요?

증거순번 366번 2907페이지부터 시작하는 조서 보면 "피해자 최씨를 납치해 살해 제의를 받은 적 있나요"라는 질문에 "네, 있습니다"라고 본인이 답했죠.

증인: 네.

검찰:  "황대한이 말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해 보세요"라고 하니, "최씨와 장씨(부부) 두 명을 납치해 코인을 뺏고 다른 사람에게 휴대폰과 가방을 넘길 것"이라고 했어요. 맞아요?

증인: 맞는 것 같습니다.

검찰: 산에 묻을 거라고 본인이 얘기했죠, 수사기관에서는. 여기선 아니지만. 맞아요?

증인: 네.

오락가락 하는 진술에 검사가 탄핵에 나섰고 이씨는 살해 계획에 대해 다시 시인하지만, 이후에도 그의 기억상실증(?)은 계속 됐습니다. 증인이기에 앞서 피고인이기에 방어권은 보장돼야 하지만, 무작정 모른다는 식의 대답이 끝없이 되풀이되던 중 방청석에서는 한숨과 헛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습니다.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이경우측 변호인: 저희도 자꾸 물어보는데, "피해자 살해까지 계획돼 있었느냐"는 질문에 "세부내용은 없었지만 큰 틀에선 맞습니다" 이렇게 진술한 것 기억 나요?

증인: 뭐라고요?

변호인: "피해자 살해 후 매장하는 것까지 계획돼 있었느냐"는 검사 질문에 "세부 내용은 없었지만 큰 틀에선 맞다"고 증인이 말했잖아요.

증인: 큰 틀에서가 무슨 뜻이죠?

변호인: '세부내용 없었지만 큰 틀에선 맞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증인: 네.

 '큰 틀에서'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으로 증인신문에는 어떻게 응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던 대목입니다. 결국 듣다 못한 재판부도 직접 질문에 나섰는데요. 모든 걸 다 '형들'한테 떠밀면서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고 운전만 했다는 이씨의 진술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강도예비에 그 어떤 혐의도 더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한 모습에, 재판부도 황당함을 숨기지는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2023. 7. 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 강남 납치·살인 사건 공판 中
재판부: 피해자를 납치해 차 뒤에 태우나요, 트렁크에 싣나요?

증인: 뒤에 태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재판부: 반항을 제압해야 할 텐데 어떻게 했나요?

증인: 저는 운전만 하는 거라서 그런 것까지 모릅니다.

재판부: 증인이 범행 도구를 렌트카로 옮겼다고 했잖아요. 마취제 용도도 안 물었어요?

증인: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 근데 마취제인 것은 어떻게 알았죠?

증인: 주사기에 마취제 성분 있다고 대한이형이 말해줘서요.

재판부: 그 말이 나온 맥락이 있을 것 아니에요.

증인: 기억 나지 않습니다.

재판부: 그것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알겠고요. 일단 납치한 다음에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증인: 폰을 빼앗아서 피해자한테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했어요.

재판부: 피해자가 순순히 안 알려줄 수 있잖아요.

증인: 제 역할 아니라 몰라요.

재판부: 비밀번호 알아낸 다음에 휴대폰은 누가 이경우한테 전달해요?

증인: 누가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어요.

재판부: 비밀번호를 알아낸 다음에 피해자를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증인: 그것도 얘기 안 했어요.

재판부: 그럼 증인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증인: 시키는대로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재판부: 범행이 끝나면 수사 시작될 거 아니에요. 도망 칠 방법을 마련했어야 할 텐데.

증인: 형들이 하라는 대로요.

재판부: 형들이 경찰에 자수하라고 했으면 자수도 했을 거에요?

증인: …그랬을 것 같아요.

무조건적 발뺌이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 증언 거부 등등은 모두 '방어권'에 포함되는 것일 테지요. 그러나 법정에서 어떤 것이 더 강력하게 작용할까요? 흔들리는 증언과, 범행 도구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증거 중에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일당은 처음 만난 그날 피해자의 시신을 유기한 대청댐 근처 야산을 둘러봤고 그날부터 두 달 동안 피해자를 미행했다는 사실과 이런 과정이 담긴 범행과 관련한 녹취입니다. 유죄를 이끌어내기 위해 검사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아야 하지만, 피고인도 무죄를 받으려면 누가 들어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합리적인 설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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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박희원 기자 wontim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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