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행복하면 무슨 재미…” 전직 교장선생님이 포크댄스 전도사가 된 까닭은[서영아의 100세 카페]
39년 교직 후 5년 당겨 명예 퇴직
초등 교사 시절 기억과 경험 살려
신중년 포크댄스 강사로 맹활약
평생학습관 경로당 복지관 누비며
시니어들 건강 사회성 자존감 높여
“도전은 즐겁고 실행이 답”이 지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수원시 권선구 서호초등학교내 댄스실. 한때 교실이었지만 지금은주민문화교실로 변신한 소박한 공간이다.
60~70대 남녀 12명이 이영관(67) 강사의 구령에 맞춰 연습을 시작한다. 남성은 모자, 여성은 스커트로 최소한의 의상을 갖췄지만, 우리가 아는 댄서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지난해 10월 자발적으로 만든 제4기 ‘포크댄스를 즐기는 사람들(포즐사)’ 모임이다.
춤추는 팔순노인 얼굴에서 소년이 나타났다…
“하나둘 셋, 하나둘 셋, 쓰리스탭 터언~, 쓰리스탭 턴! 돌고 손뼉 칠 때 시선은 어딜 봐라? 파트너를 봐라. 턴할 때 다리가 뻗정다리면 안 되죠. 자세를 낮추라고 했어요. 다시 한번!”
회원들의 움직임이 성에 차지 않을 때는 목소리가 커지는 게 영락없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최근 오는 10월 수원화성문화제 출전이 결정되면서 그의 신경이 조금 곤두서 있다.
출전작은 러시아의 대표적 민속춤 코로브시카(행상인의 춤). 동명의 민요 리듬에 맞춰 남녀 한 쌍으로 춤추는 포크댄스다.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뛰고 열을 내는 동작이 많다는 게 특징이다.
틀리는 곳을 고치고 반복하는 연습 중에 그가 정색하고 말한다.
“지금은 연습 중이니 제가 발이 틀렸다고 막 잔소리하죠. 하지만 실제 대회에 나가면 수원 시민들은 우리 발이 틀리나 맞나 유심히 안 봐요. 그럼 뭘 보느냐? 우리 표정을 보죠. 저 사람이 행복하게 춤추나? 지금 포크댄스를 즐기고 있는가를 봅니다. 우리 모임 이름이 뭐죠? 포즐사, 포크댄스를 즐기는 사람들이죠? 포크댄스는 즐겨야 하는 겁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난다. 음악이 빨라지고 열기가 달아오르자 팔순 노년의 얼굴이 마법처럼 소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표정은 본심을 숨길 수가 없다. 이분들, 즐기고 있구나.
곡이 끝난 뒤 누군가로부터 “마지막 부분 음악이 너무 빠르다”는 탄식이 나왔다.
“힘드시죠. 지금 헉헉대시는 분, 이게 정상이에요. 코로브시카는 상급 코스예요. 우리가 초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이걸 택한 거예요. 뒤로 갈수록 음악이 빨라지는 건 포크댄스 음악의 특징이에요. 달리기할 때 피날레처럼 있는 힘 다해 달려야 하는 구간이에요. ”
알기 쉬운 언어로 힘있게 설명한다. 최고령자는 79세 백홍준 씨, 아들뻘인 강사의 구령에 맞춰 꼼짝없이 발을 맞춘다.
제4기 포즐사는 수원시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포크댄스 제자가 된 오희강(68) 씨가 회장을 맡아 팀을 모았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그에게 재능기부를 요청한 것. 강의를 들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여들었다. 오 회장은 “이 나이에 학예회 준비하듯 상기된 기분에 빠져 지낸다”고 말한다.
이광복(63) 씨는 “활동량이 많아서 운동도 잘 되고 이렇게 팀워크도 다지다 보니 너무 좋다”고 말한다. 조성완(78)씨는 “강사 선생님이 잘못된 것은 호되게 지적해주는데 다 저희 잘되라고 그러는 게 느껴진다”며 “이왕 즐기려면 확실하게 배우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준다.
●“나는 포크댄스 전도사이자 평생학습 전파자”
이영관 강사는 1956년생 수원 토박이다(호적은 1959년생). 교직에서 39년 근무한 뒤 7년 전 명예퇴직했다. 1977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돼 경기도 내에서만 중학교 국어 교사, 지역교육청 장학사, 중학교 교감, 교장, 경기도 교육청 장학관 등을 두루 거쳤다.
이런 그가 퇴직 후에는 신중년 포크댄스 강사로 거듭났다. 지역의 평생학습관, 복지관, 경로당 등 시니어가 모이는 곳이 그의 활동 무대다.
포크댄스에 ‘꽂힌’ 계기는 신참 교사 시절 어느 숙직 날 학교 운동장에서 본 교회 수련회 포크댄스의 장관. 이때부터 포크댄스 연구를 시작했고 그가 몸담았던 수원 매원초교는 포크댄스 실행교가 되었다. 교직원 포크댄스 연수회에서 4년간 20여 종을 지도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인연은 그가 중학교 교사가 된 1984년 뒤로는 명맥만 유지할 정도에 그쳤다.
-그냥 ‘내 할 일만 한다’는 자세로 버티지 그러셨어요.
“제 생각과 동떨어진 공문을 ‘장학관 이영관’ 명의로 내려보내야 했는데 자존감이 땅에 떨어졌어요. 허수아비 노릇 하며 자리를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일선 학교로 돌아가 원로교사 생활을 1년 한 뒤 명예퇴직 신청을 했습니다.”
-퇴직할 때 포크댄스 강사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전혀요. 이런 삶을 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탁구 교실이니 통기타 강습, 남성 요리 강습 등을 들으러 다녔어요.”
인생 후반에 화려하게 부활한 포크댄스
포크댄스는 그가 은퇴 2년 차에 찾아간 수원시 평생학습관 인생 수업 모임에서 소환됐다. 지역 퇴직자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뭐라도 공부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뭐라도학교’. 그는 동기들에게 “수업 후 그냥 가지 말고 포크댄스를 배우며 가까워지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시작된 포크댄스 동아리 ‘포즐사(1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뒤 포크댄스 강사 일은 본궤도에 올랐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에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역주민과 함께 포크댄스 한마당’을 펼쳤다. 아파트에 현수막을 내걸고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경로당을 찾아가 홍보 활동을 벌였다.
그의 목표는 ‘포크댄스로 건강하고 신바람 나는 신중년 문화 만들기’. 포크댄스를 통해 신중년의 건강과 사회성 증진, 자존감과 성취감 증대, 사회봉사를 통한 자아실현을 꾀하겠다는 것. 실제 1석 5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신한다.
“혼자만 행복하믄 무슨 재민겨”
-그래서 지금 행복하세요.
“저야 너무 행복하죠.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저는 ‘혼자만 행복하면 무슨 재민겨’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선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하고 그다음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자. 그게 진짜 행복이다. 나는 행복한데 주위 사람들은 불행하다면 그건 진짜가 아니죠.”
-포즐사 연습할 때 보니 끝에 속도가 빨라졌을 때 정말 즐거움이 막 폭발하는 느낌이 전달돼 오더군요. 동심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제 보람이 그거예요. 팔십 넘으신 분의 빨갛게 상기되고 미소가 만개한 얼굴에서 그분의 청춘을 봐요. 참 소중한 발견입니다.”
그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고 한다. ‘신중년 포크댄스 경연대회’를 직접 주최하는 것.
“경로당이나 복지관에서 대회에 출연하려고 막 연습들을 하겠죠. 그러면서 그분들이 건강해지는 거죠. 그걸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장소나 비용은 지자체 지원을 좀 받아야 하려나. 상의를 해봐야죠.”
지론은 ‘도전은 즐겁다. 실행이 답이다’, 모임이 있는 곳마다 포크댄스를 도입하자고 제안하고 나선다. “우선 친교와 화합 시간을 가지라는 얘기죠. 거기에 레크리에이션을 넣고 포크댄스가 들어가면 제가 재능기부를 하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어느 틈에 한마음이 돼요.”
“코로나 전에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총동문회에도 포크댄스를 접목했어요. 함께 등산을 끝내고 식사 전에 포크댄스 시간을 갖는 거예요. 300여 명이 동시에 춤추는 장관이 벌어지죠. 서로 돌아가면서 ‘저 0회 누굽니다’ 하면 ‘아, 후배구나’ 하고.
어떤 후배는 ‘태어나서 처음 남자 57명의 손을 잡아봤다’고 하더군요.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악수하다 보니까. 하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선생님은 지역사회에 잘 스며든 경우인데, 일반적으로 퇴직 후 갈 곳이 없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등산족이 대표적이죠. 체력만 강화하면 뭐 하겠어요. 평생 배운 것들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사회에 환원해야죠.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정서적 방황이 줄어들 거예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우리 삶 자체가 배움이죠.”
그에게 포크댄스는 세상과 만나는 매개체다. 자신을 편하게 열고 타인을 수용하는 사회성을 부여해주고 남을 이해하고 교류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나아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이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최근 영통구가 예산이 없다며 9월부터 경로당 4군데의 포크댄스 수업을 없애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예산이란 시간당 2만 원의 교통비 지원이다.
“오늘(25일) 종강이었는데, 어르신들이 2학기부터 수업이 없어진다고 서운해하세요. 그래서 ‘지원 없어져도 불러주신다면 언제라도 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르신들이 기뻐하신다면 저도 기쁘니까요.”
수원=서영아 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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