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흔든 판결] 일터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여성 지위 신장한 ‘전화 교환원’ 판결
1·2심서 공사 승소, 대법원서 뒤집혀
남녀고용평등법상 규정으로도 명문화
“열심히 하면 뭐해. 결혼해서 임신하면 잘릴 텐데. 진급도 못 하고 잔심부름만 하다가 사라지겠지. 총무부 미스킴이 우리 미래야.”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0년대 여성 근로자들의 현실을 보여줬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 진출이 활발해진 상황에서도 고용시장에서 여성은 저평가 받았다.
이는 가부장제 문화와 관습에 기인한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피부양자로, 가정 내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인식됐고, 성(性) 역할에 대한 이 같은 고정관념이 노동 시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여성이 ‘2차 소득원’으로 간주된 것이다. 남녀가 동일한 자격을 갖췄다면 기업에서는 남성을 우선 채용했다. 기업 입장에서 여성은 결혼 전 잠시 ‘머무는’ 인력에 불과했고, 결혼 후 퇴직은 사회적 관행이었다. 여성 근로자에 대한 차별은 근로자의 모집과 채용에서부터 임금, 승진, 고용 형태, 퇴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고용 시장에서 여성의 지위는 대폭 향상됐다. 지난해 한국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54.6%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인 53.2%보다 높다. 전체 학사학위 취득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85년 37%에서 2005년 50.5%로 높아졌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남성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상회하는 정도로 올라간 것이다.
고용시장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변화하게 된 데는 법원 판결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후반에 나온 이른바 ‘전화 교환원’ 판결이 시초였다. 우리 헌법과 노동법이 제정된 이래 최초로 성차별에 대한 위헌·위법을 주장한 사건이었다.
◇헌법·노동법 제정된 이래 첫 성차별 사건
1970~80년대에는 전화국에서 가정이나 직장에 전화선을 연결해 줘야 통화가 가능했다. 이런 역할을 하던 사람이 전화 교환원이다. 교환원은 여성이 주로 하던 일이다.
1982년 1월 체신부 전기통신 업무가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이관됐다. 이후 한국전기통신공사 측은 1982년 5월 인사규정을 개정해 일반직과 기능직의 정년은 55세로, 교환직렬 직원의 정년은 43세로 정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 같은 내용으로 단체 협약을 체결한 후 여성 교환원 A씨에게 정년퇴직을 통보했다.
A씨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교환직렬의 정년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다른 직원보다 12세 낮게 정한 것은 법 앞에서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과 남녀의 차별적 대우를 금지한 근로기준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또 교환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취업 규칙을 불리하게 개정한 것은 위법이라며, 정년퇴직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공사 측은 “통신시설의 전자화로 인한 인력절감의 필요성 등 교환직렬의 특수성을 감안해 조항을 신설했다”며 맞섰다. 해당 조항이 남녀 교환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므로 남녀평등 원칙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며, 노동조합의 추인을 받아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사건의 쟁점은 교환직렬 정년을 다른 직렬보다 12년 낮게 정한 조치가 교환직렬의 특수성을 감안한 합리적 차등인지, 아니면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인지 여부였다.
서울민사지방법원(1심·1983년)과 서울고등법원(2심·1985년)은 공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불합리한 차등 대우를 금지하는 상대적 평등인 바, 인사 규정의 개정은 여성을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환원 직종의 특수성과 인력 수급 등의 사정을 고려해 교환원이 체신부 소속 공무원으로 있던 때의 정년인 43세로 환원한 합리적 차등”이라며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공사가 적법하게 체결한 단체협약으로 추인된 것이므로 유효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반대 판결을 내렸다. 교환원 직종은 여성 전용 직종으로 보이는 데도 공사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여성 근로자들이 조기 퇴직하도록 부당하게 낮은 정년을 정했다고 판시했다. 때문에 이는 근로기준법상 남녀차별금지 규정 위반에 해당되며, 무효로 봐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교환직은 전통적으로 여성 근로자로 충당됐고, 인사 규정을 제정할 무렵 약 4800명의 교환원 중 남성은 불과 3명에 불과해 여성 전용 직종으로 볼 수 있다”며 “그 정년을 다른 직종보다 12세 낮게 정할 만한 사정이 있는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핀 뒤 합리적 차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논리로 원심 판결을 지적했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의 하민경 연구위원은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용 상 성차별을 문제 삼아 여성 근로자가 제기한 사건에서 성차별을 인정한 판결임과 동시에, 성차별 여부에 관한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직장 내 남녀 차별 대우 여부를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으며, 직장 내 남녀평등 원칙을 확인해준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취지다.
◇판결 이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간접차별 ‘명문화’도
전화 교환원 판결 이후 여성의 정년 차별은 해소됐다. 아울러 여성의 평등권과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입법 활동과 권리 구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1989년 4월에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을 통해 ‘입증 책임’ 규정이 신설되며 이 같은 흐름을 가속화했다.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관련 분쟁에서 입증 책임을 사업주가 전적으로 부담하도록 해, 근로자의 입증 책임을 없애준 것이다.
전화 교환원 판결 결과는 1999년 2월 8일 개정을 통해 남녀고용평등법상 규정으로 명문화됐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차별이라 함은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혼인 또는 가족상의 지위, 임신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달리하거나 기타 불이익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사업주가 여성 또는 남성 어느 한 성이 충족하기 현저히 어려운 인사에 관한 기준이나 조건을 적용하는 것도 차별로 본다’고 규정한다.
해당 조항은 직접 차별은 물론 간접적인 차별도 규제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직접 차별은 ‘군필’, ‘남성 우대’처럼 특정 성별에게만 유리한 명시적인 기준을 말하고, 간접 차별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뜻한다.
일례로 면접에서 장애인에게 “농구팀에서 포지션을 맡아 본 적 있냐”고 묻는 것이 간접 차별이다. 비장애인은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반면, 장애인은 답변하기 쉽지 않다. 이처럼 간접차별은 외형상 중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업주의 차별 의도를 효과적으로 은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악용의 우려가 많았다.
노동위원회의 전향적인 결정과 대법원 판결도 연이어 나왔다. 노동위원회의 경우 생산직 직원인 남성보다 여성의 정년을 2~3세 낮게 정한 조치에 대해 남녀의 노동 능력에 대한 실질적인 차이가 없으므로 합리성이 결여돼 무효라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은 한 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여성 사원이 98% 이상 퇴사하게 되자 해고의 부당성을 다툰 사건에서 “사직할 뜻이 없는 근로자에게 정리해고의 요건을 갖추지 않은 채 해고한 것은 부당해고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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